친애하는 세실 양에게,
저는 제 인생 영화 중 하나로 만갈 판데이를 꼽습니다.
영국인 장교를 구해낸 세포이인 만갈 판데이라는 인물은 자신의 어리석은 종교적 신념이 비현실적이고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끝내 유지하며 항쟁이라는 미명 하에 사실상 폭동을 일으킨 쓰레기라는 중요한 메시지와, 막강한 영국군의 무차별적 진압과 폭정에 의해 세포이들이 무너지는, 힘에 의해 유지되는 질서를 여실히 보여주면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영국군은 세포이들을 진압하면서 총을 사용합니다.
총이 세상에 처음 등장했을 때, 그 방식은 화염방사기와 유사했고 유산탄을 섞어 쏘기도 했습니다.
화약과 총을 발명한 중국은 여러 단점과 약점을 보완하고 살상력을 개선해가면서 압축 가스 내에 질산염 비율을 높여 폭발력을 증강시켰고, 900년대에 처음으로 총을 동원합니다.
스페인은 1356년부터 아르까부스라는 화승총을 전장에서 사용했고, 훗날 일본이 66개국으로 나눠져 있던 센고쿠 시대에 포교의 자유를 부여 받기 위해서 에도 막부의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선물했죠.
일본은 한때 한 지역민 전체가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천주교 신자가 되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유럽 전체에서 생산하던 조총 총량의 열 배가 넘는 조총을 일본이 혼자서 생산하면서 1597년부터는 나가사키를 시작으로 천주교 집단 박해를 시작합니다.
종교를 전파하려 했던 시도는 결과적으로 일본의 제국주의를 촉발했던 셈입니다.
10세기에 처음 만들어진 총은 19세기 초반까지도 화약과 총알이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탄을 쏠 때마다 복잡한 방식으로 장전해야 했습니다.
숙련된 사수는 분당 3발을 쏠 수 있었고, 조금 더 시일이 지나자 병사들은 미리 원통 형태로 만들어둔 종이에 화약과 탄환을 넣어 보관하다가 총구에 그대로 밀어넣고 발사했습니다.
첫머리에 상기한 영화에서는 작동 방식이 제대로 고증되어 엔필드 머스킷이 어떻게 장전되고 격발을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어쨌든 그러한 방식에서 착안하여 종이로 탄피를 만들고 거기에 장약과 탄환을 넣은 뒤 총이 발사되면서 탄피배출구로 탄피가 배출되도록 했던 헨리 라이플이 윈체스터 사에 의해 개발되어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사용했습니다.
종이로 만든 탄피는 수분이 스미는 것을 막기 위해 소의 기름을 발라두었다가 입으로 뜯어서 총에 장전했는데, 인도 출신의 세포이 용병들에게는 종교적으로 그리고 통념상으로 용인될 수 없었던 행위였죠.
세포이 항쟁의 발단은 다양한 이유가 유기적으로 작용했지만 근본적 원인은 바로 탄피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연방종합과학연구소에서 가동한 타임머신을 통해 근대 시대를 관측하면서 물리 변위에 의해 열에너지가 가장 많이 집중되는 장소 중 하나였던 리투아니아로 좌표를 설정했습니다.
18세기 후반의 시대에 도착한 때, 마침 폴란드 3차 분할 이후 리투아니아의 쿠를란트를 러시아군이 점령한 상태였습니다.
러시아의 병참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고 모자라는 물자와 식량을 군 내부에서도 병사들에게 약탈을 통해 해결하라고 지시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리투아니아와 폴란드가 갈기갈기 찢겨나간 것은 그들보다 더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군인들은 약탈을 통해 끼니를 해결하기엔 턱 없이 모자랐던 돼지, 소, 닭, 토끼를 대신 해서 틈만 나면 사람 고기를 먹는 게 일쑤였는데, 보통은 가정집의 가족을 모두 몰살하고 몇날 며칠을 머물면서 뼈만 남을 때까지 고기를 먹어치우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렉터 박사가 머물던 집에 러시아군이 들이닥쳐 여동생인 미샤 렉터를 끓여먹기도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러시아군이 사람 고기를 먹는 것은 관습처럼 굳어져 러시아가 미국에 이은 세계 두 번째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종심타격이론을 구현했던 193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습니다.
저는 그때의 리투아니아를 떠나 그간 여러 나라들을 전전하다가 지금에 이르러 미국 북동부에 머물고 있습니다.
전쟁의 역사 한복판에서, 총성이 끊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의 피 냄새와 시체 냄새가 온 도시를 휘감는 곳에서, 썩은 시체로 인해 역병이 전사자보다 더 많은 희생자들을 내는 곳에서, 저는 힘에 의해 정돈되어가는 질서를 지켜보았습니다.
미국은 당시 남북 분쟁으로 한창 혼란했던 시기라 일리노이와 위스콘신의 격오지에서는 쉽게 사람 고기를 접할 수 있었죠.
족벌농장을 하던 고립된 주택들 위주로 농장 소유주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한 후 가족을 모두 때려 죽인 뒤 고기로 익혀 먹었답니다.
렉터 박사가 일러주었던 발골 방식과 부위별 결 정돈 방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없을 정도로 우아하고 완벽했습니다.
한 번은 시카고 외곽의 아일랜드 이민자 가족들이 대마밭을 가꾸고 있었는데, 그들과의 정찬 자리에서 저는 연달아 몇 개의 대마를 흡입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식사는 굉장히 유쾌했고, 당시 미국 땅에서 저와 식사를 함께 한 모든 가족들을 통틀어 그들은 유일하게 살아남았었습니다.
대마가 다양한 충동적 욕구를 억눌러주었고, 특히 사람 고기에 대한 갈망을 상쇄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1861년, 노스캐롤라이나의 허트포드에서 머물던 당시, 분쟁이 전쟁으로 확산되면서 저는 거의 매일 전선으로 출발하던 부대와, 부상 당했거나 죽은 병사들이 귀환하는 걸 목격했었죠.
저는 처음에 죽은 병사들이 전투로 전사한 걸로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그들 대부분이 전투가 아닌 질병과 전투 외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아직 화기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곳에 방치된 병사들의 시체는 생각보다 빠르게 부패하고 있어서 요리를 하기엔 적합하지 않더군요.
나는 그 다음 해인 1862년, 인디애나폴리스에서 개틀링 공업사에 대마 파쇄기를 사러 갔다가 사장인 리처드 조던 개틀링을 만났습니다.
개틀링은 기업의 대표이면서 동시에 사십 대의 나이에 늦게 의대에 가서 여러 의학기기를 개발 중이었는데, 질병의 확산 방지 의술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침 공업사 리셉션에는 하이럼 스티븐스 맥심이라는 청년이 메인의 생거빌에서부터 출발한 뒤 기나긴 여정에서 이제 막 도착하여 램프에 쓰일 연소용 가스 가격을 에누리하고 있더군요.
연기가 나지 않는 화약을 공급해줄테니 가스 가격을 절반으로 낮춰달라는 조건이었습니다.
그에게 흥미가 동한 저는 맥심, 그리고 개틀링 사장과 함께 이틀에 걸쳐 오후부터 자정을 넘긴 시간까지 심도 깊은 토론을 펼쳤습니다.
질병에 감염되기 쉬운 열악한 환경에서 싸우는 병사들이 질병에 노출되기 전에 다 죽일 수 있는 아이디어를 함께 고안했죠.
우리는 병사들의 수를 줄이면 대군의 필요성이 줄어들 것이고 그 결과 전투를 하거나 질병에 감염되는 일 또한 줄어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마침 그때로부터 2년 전, 탄피가 발명됐었는데, 그 발명품을 우리가 고안한 아이디어에 접목시켜 맥심의 주도로 분당 650발을 연사하는 맥심 기관총을 보급시켰습니다.
군의 의뢰가 있었던 것도 군 관계자와 가벼운 소통조차 있던 것도 아니었기에 군부는 의아하게 여기기도 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맥심 기관총은 굉장한 속도로 군에 보급되었답니다.
결과적으로 대다수의 군대는 이러한 신병기에 대항해 더 많은 병사들을 투입하는 인해전술을 택했고, 개틀링 사장은 여기에 전기모터를 장착하여 분당 3천발을 연사하는 개틀링 건을 개발했습니다.
대충 조준만 한 채로 방아쇠를 당기면 수십 수백명이 죽어나갔습니다.
맥심은 1890년부터 유럽 각국을 돌며 영업을 해나갔고 세상 곳곳에서 살인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성능을 입증했던 몇 가지 예들을 보자면,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우금치 고개 전투에서 조선일본연합군이 동학군과 대치하면서 관군이 가져온 개틀링 건에 의해 단 3000명만 남기고 남접군 10000명과 북접군 10000명이 일방적으로 섬멸당하고 농민운동 자체가 와해된 적이 있죠.
1896년에는 영국의 비커스사가 맥심사를 인수하여 기존 27킬로그람의 맥심 기관총을 20킬로그람까지 경량화하고 머즐 부스터를 달아 개량했습니다.
2년 뒤인 1898년, 영국군은 수단을 점령할 목적으로 8000명의 영국군과 17000명의 이집트군으로 구성된 혼성부대를 옴두르만 전투에 투입시켰고 52000명의 다르비시 전사들을 상대로 교전 30분만에 다르비시 전사 4000명을 사살한 바 있습니다.
5시간 뒤 수단의 다르비시 전사들은 10000여명이 전사하고, 13000여명 부상당했으며, 5000여명이 포로로 잡히는 궤멸적 피해를 입었고, 수단의 칼리파는 살아남은 잔여 병력 24000명과 함께 후퇴해서 후일을 도모했지만 그 다음 전투에서도 속절없이 패배하고 그 자신도 전투 중 사망했죠.
수단은 1956년까지 영국 치하에 놓이게 됐고, 성능을 입증한 맥심 기관총은 유럽 열강들에게 없어서 못팔 정도로 불티나게 팔려나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같은 해 발발한 미서전쟁에서도 물론, 1904년 러일전쟁에서도 러시아군의 맥심 기관총 한 정이 일본군 한 개 대대를 도륙한 적도 있었습니다.
돌격에 의존하는 구시대적 전술과 신기술의 조합이 끔찍한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1차대전에서는 루이스 경기관총과 함께 1916년 베르됭 전투에서 12시간 동안 10만 발을 12시간 동안 연속으로 발사하며 병사들의 사지를 찢었습니다.
1922년 아일랜드 내전 당시 더블린 시가전에도 투입되었고, 이후에도 한국 6.25 전쟁과 남아프리카 국경 전쟁에 이르기까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활약을 해왔습니다.
여기에 더욱 괴물 같은 일화가 남아 있는데 1963년 퇴역하기 전 재고 탄약이 잔뜩 남아있자 1정으로 5백만 발을 쏘는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1시간 반마다 총열을 갈아 가며 7일간 밤낮으로 쉬지 않고 쏴 갈겼는데 단 한 건의 기능 고장도 발생하지 않았고 총에도 아무 이상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이 혁명적이고 획기적인 살인병기는 전장의 군인들을 땅 속으로 밀어넣었죠.
이윽고 전장의 풍경에 방독면과 참호, 탱크를 그려넣었습니다.
과학자와 기술자, 군지휘관들은 땅 속에 들어간 군인들을 죽이기 위해 새로운 개념의 또 다른 강철기계를 개발해냈습니다.
또한 화학을 이용한 치명적인 기체병기를 사용하여 소리없는 살상을 가능케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생각대로 맥심 기관총과 개틀링 건은 효과적으로 전쟁 횟수를 경감시켰고, 전쟁의 억제는 드디어 1945년 핵에너지 개발로 실현되었습니다.
인류는 이제 스스로를 수십 번 자멸시킬 수 있는 폭탄더미 위에 살고 있죠.
힘 앞에 굴종해야 하는 세상은 세실 양의 말처럼 그리 머지 않았습니다.
당장 세상은 페미니즘과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병든 과도기를 겪고 있지만 그것은 힘에 의해 유지되는 질서를 정당화시키고 자본주의 맹아론이 그릇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그리고 범지구적 프로파간다에 의한 필수불가결한 과정일 뿐입니다.
역사는 다시 반복될 것입니다.
그 반복되는 역사의 시작을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마치 총처럼 질서를 유지하는 강한 힘과도 같아서 불가항력적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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