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동이 1동과 2동으로 나뉘어져 있던 당시, 전국적으로 8학군 입학 열풍이 불면서 청담2동에서 많은 전월세 집이 쏟아져 나왔다.
지방에서는 8학군에 자녀들을 입학시키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의 출신지는 강원도, 경기도, 충청도에 비해 경상도와 전라도가 압도적으로 높아 어느 새부턴가 생소한 사투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박카스 중독이라 박카스를 사러 하루에 적어도 세 번을 약국에 드나들었는데, 매일 찾던 약국에서도, 식당에서도, 교실에서도, 거리에서도, 어디서나 지방 사투리를 들을 수 있었다.
90년대 중반에 영등포에 미국 식제품을 취급하던 프라이스 클럽이라는 마트가 있었는데 요즘은 꽤 보편화된 창고형 마트와 마찬가지로 회원제로 운영되었던 곳이다.
갈 때마다 누군가가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는데 대부분은 왜 수퍼마켓에 들락거리는데 입장료가 있느냐는 핀잔부터 시작됐다.
법대로 하자는 말까지 들먹거리던 사람들의 말투는 서울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의 사전에는 규정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의 말은 얼핏 중국어나 일본어처럼 들려서 좀 더 신경 써서 들어보면 분명 한국어이긴 한데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들의 말투는 제법 신경을 곤두서게 하여 듣는 내내 거북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이런 기분을 누군가에게 토로하기 조심스러웠는데 나중에 보니 나만 느낀 기분만은 아니었다.
나중에는 친구들이나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서울에서 나고 자랐는지, 지방에서 왔음에도 서울 토박이라고 우기는 사람인지를 가늠하는 나름의 판별법도 생겼다.
구로에 있었던 애경 백화점이나 남대문에 있었던 미도파 백화점을 아느냐부터 시작해서 경기 북부와 서울에서만 존재하던 당시 몇 가지의 서울 사대문 사투리를 아는지의 여부도 그 일종이었다.
각설하고 지방에서 온 사람들에 대한 게운하지 못한 거부감을 나뿐 아니라 친구들은 물론 내 부모님 또한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었고 급기야 우리 가족은 그 동네를 영영 떠나게 됐다.
부모님이 이사를 결정한 이유는 단순히 사투리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이사하기 일 년 전, 쓰레기 종량제가 처음 시행됐다.
그 해 말, 초겨울 아침 제법 찬바람이 동네 골목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한 무렵부터는, 종량제 봉투는 용량이 잔뜩 초과된 채 테이프로 칭칭 감겨있어 쉽게 찢어지고 때에 따라 비집고 나온 휴지나 과자 봉지 같은 쓰레기가 지천으로 나뒹굴었다.
바로 일년 전까지만 해도 다소 심심했던 골목들은 이제 썩은 음식물이 봉투 밖으로 흘러나와 역한 냄새로 가득했다.
무슨 심보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누군가가 뭔가를 집어던져서 차 유리를 박살내거나, 발로 사이드미러를 부숴놓는다든지 하는 전에 없던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자정을 넘긴 시간에는 심심찮게 고성방가가 들려오고 아침 등교길에는 여기저기서 오줌 지린내가 풍겨왔다.
친했던 이웃들은 여름을 맞기 전에 세를 놓거나 팔아치운 후 떠났고, 우리 가족은 일년을 꼬박 더 지내다 새 겨울이 찾아올 즈음 동네를 떠났다.
아버지가 자기 입맛에 맞도록 나름 애써서 직접 설계한 곳이라 애착을 놓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이 눈 뜨고도 코 베어가는 곳이라고들 했다.
정말 그랬다.
하지만 눈 뜬 사람의 코를 베어가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이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들이었다.
강간, 방화, 살인, 사기 등의 강력범죄는 대부분 그들의 몫이었다.
한때는 마치 유럽이나 북미에서처럼 서울에서도 생판 모르는 사람끼리 가벼운 인사를 나누던 때가 있었다.
이제 그런 문화는 완전히 사멸되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상대적으로 소득, 구매력 지수, 학력 수준이 떨어지던 지방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젖어 서울에 염세주의를 뿌리내리게 했다.
당췌 서울과 지방, 어디가 더 정이 없는 곳이었나.
서울이 인심 각박한 외로운 곳이라고들 했다.
나는 그 평에는 전혀 동조를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지방에서 각박함을 느꼈었다
뒷사람을 위해 엘리베이터나 출입문을 잡아줘도 고맙다는 말 돌아오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고, 길 지나는 상대방을 방해하기 위해 어깨를 치고 가거나 길 한 가운데로 가는 일도 흔한 일상이었고, 서울에서는 익숙했던 백화점 등의 에스컬레이터에서 먼저 가는 사람들을 위해 오른쪽으로 붙어 서주는 문화가 아예 없다거나, 마트에서 카트를 끌고 길을 막아둔 채 자기 물건 고르는 몰상식은 그저 관습처럼 여겨지는 듯 했다.
사소한 배려들을 나는 서울에서 당연한 듯 느껴왔지만 지방에서의 삶의 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물론 뭐가 옳다 그르다 할 가치판단의 기준은 없을 것이다.
요즘은 서울도 별반 다를 게 없어졌다.
지방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나는 서울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잊을 수 없다.
장마철마다 중랑천은 범람하여 지하철역에서 역류하는 물과, 지천을 따라 떠내려가던 한강 둔치의 컨테이너 매점들을 보며 박장대소를 터트리기도 했다.
성화봉송식에서 비둘기가 떼죽음을 당한 그날은 밤 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친구들과 나는 무너진 성수대교를 보러 한껏 기대에 부풀어 이십분 정도를 걸어가 미증유의 사태를 두 눈으로 보고 그날 밤에 부모님에게 들뜬 채로 떠들어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그게 왜 웃기냐며 나를 타박하고 두들겨 팼다.
그 순간들도 잊혀지지 않는다.
지방보다 더 빠르게 개인주의 사회로 넘어가던 과도기에도 지방과는 다른 정이 존재했던 그때의 서울이 진짜 사람 살던 곳이고 진짜 사람 살던 때였다.
그리고 그 과도기의 부수작용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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