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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백주대낮에 한 사내가 대로에서 불에 타 죽었습니다.
뼈만 남기고 살점이 거의 모두 바삭하게 타서 재가 될 정도로 강한 불이었죠.
그런데 경찰은 살을 연소시킨 황린화합물이나 벤젠과 같은 촉매제를 시신에서 찾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목격자들의 진술은, 불이 시작되어 모두 연소되기까지 십분이 걸리지 않았던 것으로 동일했습니다.
연방종합과학연구소에서조차 발화의 원인을 확실히 규명하지 못할만큼 기이한 사건이었죠.

각설하고, 저는 그 연구소에서 일년간 근무하고 불과 몇 시간 전에 해고 당했습니다.
불과 반나절 전에 짐을 모두 꾸리고 집으로 갈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왔었죠.
그런데 비행기를 끝내 타지 못했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선의를 베풀고자 체크인을 마지막에 진행했으며 검색대는 모든 사람에게 양보해서 끝내 비행기를 탈 수 없었고 집에도 돌아갈 수 없어서 공항 대합실에서 빌어쳐먹다가 이 글을 쓰는 중입니다.

참담한 지금과 달리 제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영광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모두의 주목을 받았고 모두가 저를 우러러보던 때가 있었죠.
특수학교에서는 차석 졸업을 거머쥐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추락의 연속이었습니다.
특수학교에 재학했던 경력을 살려 특수부대에 자원했으나 거절당했고 특수화물 운송회사 등에 이력서를 넣었으나 단 한 군데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더군요.
국가와 해당 업체들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가 연달아 패소했고 그때는 이미 변호사 수임료와 소송비로 전재산을 탕진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 연속적인 불행의 끝에는 다시 치고 올라갈 수 있는 바닥이 있었습니다.
재작년 겨울, 저는 버거퀸에서 햄버거를 하나 산 뒤 한파를 피하기 위해 포장마차로 들어갔습니다.
자리에 앉아 햄버거 포장을 풀어헤치는데 갑자기 사장님이 춥다고 소리를 지르며 오뎅 국물을 제 머리에 붓더군요.
그때 누군가 갑자기 들이닥쳐 주방장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리더니 이윽고 저에게 다가와 ‘추울 때는 렌지에 들어가서 돌리면 된다’는 말을 읊조리면서 제게 명함을 내밀었습니다.
명함에는 하밀카르 렉터라는 이름이 금박된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분은 당시 연방종합과학연구소의 연구부장으로 재직 중인 분이었죠.

어쨌든 그분이 대뜸 제게 물으시더군요.
평소 라면을 어떻게 끓이느냐고.
저는 평소 라면의 깊은 맛을 최대한 많이 우려내기 위해 다섯 시간 정도 끓여서 먹습니다.
그대로 답을 드렸고 저는 그날 인간게놈 시퀀싱 부서로 즉석 채용되었습니다.

연구소를 드나들며 제가 지켜본 렉터 박사님은 매사에 완벽을 추구하고 자기관리에도 철저하여 주위의 존경을 한몸에 받던 분입니다.
섹스 스카우터를 발명할 즈음부터 최고의 명예를 거머쥔 그분에게는 고위관료들이 친분을 쌓기 위해 많이 모여들었고 자연스레 그 명예에 걸맞는 권력을 거머쥐기도 했습니다.
저는 저에게만 불행이 닥쳐온 줄 알았는데 그런 박사님이 겪어온 불행도 그리 다르진 않더군요.

박사님이 결혼할 당시 프로포즈 조항이 백 가지가 넘어갔는데 그 중 가장 기괴한 것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분은 무슨 생각이었는지 프로포즈를 승락하고 두 분은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됐습니다.
박사님은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었죠.
아내분께서는 2000년 1월 1일, 20세기의 말년 첫 하루에, 반코마이신에 내성을 지닌 황색포도상구균, 이른바 수퍼박테리아에 감염되어 유발된 치명적 패혈증으로 결국 유명을 달리 했습니다.
평생 단 한 번도 씻지도 못한 채 궁창같은 악취를 풍기다가 수퍼박테리아로 인해 삶을 마감한 것이죠.
그날 여전히 세상은 종말하지 않고 오히려 차분하고 고요하게 눈을 흩날렸지만 렉터 박사님의 세상은 아내분이 떠난 그날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어제 아침 연구소 강당에서 소집이 있었습니다.
전직원은 물론 수많은 기자들이 응집한 가운데, 그동안 연구소는 다른 평행우주와 교신을 해오면서 인체의 자연발화에 대한 원인을 규명했다는 중대한 발표를 했습니다.
세포 속 칼륨에서 나온 감마선과 중수소의 충돌에 의한 미시적 핵폭발로 발화를 일으킨 것이더군요.
또한 렉터 박사님이 장기간의 휴직을 마치고 복귀함과 동시에 연구소장 진급을 축하하는 자리이기도 했어서 분위기가 한껏 고조됐었죠.

소집이 끝나고 정오부터는 연구소의 전기공사가 있었습니다.
제가 일하던 연구실에는 제 절친이었던 투구게도 한 마리 있었는데 한켠에 액체질소 탱크가 있었기 때문에 그 친구에게는 굉장히 추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를 위해 등유 난로를 켜고 몸을 좀 녹이라는 의미로 난로 위에 자리를 마련해주었죠.
그런 배려에도 불구하고 시발 병신같은 투구게가 제 의사도 묻지 않고 혼자서 주황색으로 변하더니 더이상 움직이질 않더군요.
어깨가 탈골될 정도의 풀스윙으로 바닥이 패대기쳐서 산산조각냈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었던 친구의 배신을 겪고 큰 상실감에 빠졌던 것입니다.
바닥에 잘게 부서진 채 널부러져 있는 투구게를 박사님이 보시고서는 저를 해고하셨습니다.
저는 친구의 배신으로 이연타 크리를 맞은 셈입니다.

최근 시작된 간빙기 때문인지 올겨울은 유난히 춥습니다.
저기 편의점에 전자레인지가 보이는군요.
들어가서 몸을 좀 데우고자 합니다.
상임이사님께서도 모쪼록 건강하시고 따뜻하게 겨울을 보내시길 바라면서, 디컴파일된 감응유전 원천기술이 포함된 유에스비를 동봉합니다.
바이너리에 더미 데이터가 존재하여 리버싱이 어렵고 api만 공개된 상태라 서버를 뚫고 메모리 덤프를 하는 수 밖에 없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