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과음을 한 나는 아침에 어렵게 일어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날 밤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곁에서 나의 남성다움을 샅샅이 파헤치듯 눈처럼 혀로 녹여냈다가 나의 몸에 올라 나의 몸을 자신의 몸에 집어넣었다.
이윽고 그녀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부르스를 추다가도 강렬한 탱고를 추며 우리의 리듬은 같은 곳에서 멈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긴 감나무 그늘 밑에서 이제는 해를 피할 수도 없는 때가 되었다.
인동초도 지고 없는 그때, 나는 그 여인과 해로를 맺었다.
감이 다시 열리고 아직은 떫을 때, 우리의 몇 가지 특징을 공통되게 지닌 한 아이가 태어났다.
다만 아이는 커가면서도 어느 정도 선천적으로 결정되는 일부 형질은 나로부터 전혀 대물림 받지 못한듯 했다.
아이는 글을 익힌 후부터 종종 수취인이 명시되지 않은 기이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편지 속에는 아이가 여태 만나보지 않았던 대상이나 아직 가보지 못한 장소가 언급이 되어있었다.
샘이라는 이름의 개, 정씨 할머니, 살인사관학교, 김대중컨벤션센터, 소재 불명의 돼지국밥집 등.
별안간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다시 간섭하기 싫었지만 이미 알아버린 기억으로부터 등장한, 아내가 언젠가 언급했던 아내의 첫사랑 렉터 박사가 봉산탈춤을 추면서 내 눈 앞에서 아이와 오버랩되기 시작했다.
순간 나 이것이 환상인지 실제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몇 번을 거듭 눈을 부비다 혼절하고 말았다.
여러 개의 공장을 운영하던 부유한 나의 인생은 하루 아침에 송두리째 뒤바뀌었다.
모든 공장을 처분하고 다시 대학에 입학하고 새로운 전공을 선택했으며, 졸업 후에는 렉터 박사가 재직 중인 연구소에 필적할만한 거대한 연구소를 차리고 나의 재력을 바탕으로 고도화된 장비들을 갖춘 후 유능한 연구원들을 고용하였다.
코딱지 팔 시간조차, 화장실에 갈 시간조차 나에게는 낭비였다.
그래서 코가 막힌 채 만성두통에 시달리기도 했고, 의자에 앉은 채 바지에 똥을 지려서 항상 내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다.
나의 유일한 친구는 똥 속에서 시나브로 피어오른 온갖 종류의 파리들 뿐이었다.
나는 개중에서 초파리 친구들을 설득하여 내 전공을 적용한 내 한평생에 걸친 감응유전 실험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되었다.
==============================
(*2014년 실제 진행된 실험 원문: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4282758/)
실험일지 #001: 감응유전
초파리들로부터 태어난 애벌레들을 우선 두 그룹으로 나누었다.
절반의 애벌레들에게는 충분하고도 남을 사과껍질을 제공하고,
절반에게는 제한적 급식으로 절식 미만의 영양을 공급하였다.
애벌레들이 다 자라 초파리가 된 후에 수컷과 암컷으로 성별을 분류하여 격리하였다.
성별과 크기에 따라 4개의 그룹이 구성되었다.
잘 먹고 자라 몸이 큰 수컷 그룹
제한 급식으로 몸이 작은 수컷 그룹
잘 먹고 자라 몸이 큰 암컷 그룹
제한 급식으로 몸이 작은 암컷 그룹
그리고 암컷의 몸 크기에는 상관 없이 몸 크기가 각기 다른 수컷과 2주 간의 간격을 두고 교미를 시켰다.
암컷이 임신이 되지 않는 조건 하에 첫 번째 수컷과 교미를 먼저 하고,
2주가 지난 뒤 가임 조건 하에 두 번째 수컷과 교미를 하게 하였다.
그리고 태어난 애벌레를 성체로 키워 몸 크기를 확인하였다.
몸 크기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는 요소들을 분석하여 아래와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몸 크기와 여러 요소의 연관성 (p-value)
비가임기에 교미한 첫 번째 수컷의 크기 0.013
가임기에 교미한 두 번째 수컷의 크기 0.948
암컷의 크기 0.027
결국 새끼 초파리의 몸 크기는 엄마 초파리가 비가임기에 첫 번째로 교미한 수컷 초파리의 몸 크기로 결정되었다.
유전자 검사에서 새끼 초파리들은 예외 없이 엄마 초파리가 가임기에 두 번째로 교미한 진짜 아빠 초파리의 유전자를 가지로 있었다.
아빠의 유전자가 아닌 유전자는 역시 엄마 초파리의 유전자로부터 온 것이었다.
결국 엄마 초파리가 비가임기에 첫 번째로 교미한 초파리의 유전자는 전혀 지니고 있지 않았다.
또한 이 결과가 단순히 암컷과 첫 번째 수컷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얻어진 것인지 정액으로 인한 것인지에 대한 후속 검증이 진행되었다.
비가임기의 암컷이 첫 번째 수컷과 교미를 하지 않은 채 한 공간에서 지내다가 가임기에 두 번째 수컷과 교미를 했을 때에는, 첫 번째 수컷이 새끼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비가임기의 암컷과 교미한 첫 번째 수컷의 유전자는 새끼의 유전자에 추가되거나 변화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첫 번째 수컷의 정액은 새끼 초파리에게 유의적 수치 이상의 영향을 미치며 첫 번째 수컷과 새끼는 거의 동등한 수준에 근접한 몸 크기를 지녔다.
하지만 정확히 정액이 어떤 요인으로 암컷의 심리적 혹은 신체적 부분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여전히 미지의 요소가 많으므로, 비가임기의 암컷에게 유입된 첫 번째 수컷의 정액이 새끼 초파리의 몸 크기를 결정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이해할 수 없다는 견해를 밝힌다.
==============================
실제 근대 유전학이 발달하기 전인 20세기 초까지는 생물학자들 역시 남성이 어떤 형태로든 여성의 신체에 자신의 흔적을 남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전자를 중심으로 한 멘델유전학이 발전하면서 감응유전은 과거의 망상으로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 환경의 영향에 의해 유전자의 발현이 조절되는 현상인 후성유전학의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면서, 그리고 후성유전학과 상관없이 비유전자적 기제를 통해 환경 또는 부계의 특성이 자손에게 전달되는 현상이 여러 동물에게서 발견되면서 감응유전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이번 연구는 감응유전이 비유전자적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음을 최초로 실험적으로 확인한 연구이며 비유전자적 요소가 진화와 적응에 특별한 방식으로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암시하는 흥미로운 결과이다.
이미 실제 인간 남성의 정액은 여성의 유전자에 변화를 시도하고, 변화가 가능한 것인지에 관한 유사 실험들이 진행되어 왔으며 획기적 성과가 있음에도 정치중립적이지 못한 과학계에서 윤리적으로 옳지 못하다는 견해로 실험이 보류되어왔다.
또한 과학계는 영리중립적이지도 못하여 불치병과 난치병을 불식시킬 수 있는 연구성과가 영리에 영향을 미치기에 정치사회적으로 연구기관과 특정집단이 밀접한 연관을 지닌 경우가 상당했다.
Epigenetic은 연구가 더 필요한 분야이기에 불가능이라고하기에는 이르며, 염기열 배열 자체에 영향은 주지 않을테지만, 단백질 발현정도에는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바이러스같은 매개체나 다른 에피지네틱 경로로 영향을 끼칠지는 미지수이며, 현 생물학 트렌드로는 단백질 발현유무가 염기열과 상등한 효과를 지니니 epigenetic의 의미는 감응유전과 상등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본 실험을 진행하며 나는 여러가지 예상치 못한 사실들도 깨달을 수 있었다.
1. 감응유전보다는 새로운 환경 조성에 따른 유전자 발현 조정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2. 창녀들의 자녀들은 거의 모든 사회적 성공 여부의 고하와 계층에 상관 없이 대부분이 정신질환을 유의적 수치로 발현하고 있다.
3. 왜 초야권이 존재했는지에 대한 고증이 가능할 것이다.
4. 나에게 처녀성을 바친 여인들은 내 아이를 n분의 1로 낳을 것이다.
5. 이미 어디선가 내 아이들이 수도 없이 많이 태어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일단 둘째 치고
6. 내가 상대 여성의 질내가 아닌 배나 엉덩이에 혹은 얼굴이나 입에 사정을 했을 때에도 감응유전이 가능한 것인지 다양한 여성들과의 실험이 필요하다. 지금 즉시 실험에 착수해야 할 것이다.
'렉터박사의 살인사관학교 > 서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댄지어스 박사의 실험일지 #004:물리적 형태를 지니지 않은 지적존재(!)의 시대 (0) | 2018.03.26 |
---|---|
댄지어스 박사의 실험일지 #003: 형태장 이론 (0) | 2017.11.03 |
댄지어스 박사의 실험일지 #002: 아나볼릭 스테로이드 (0) | 2017.11.03 |
윤 데이빗 박사의 1번째 편지, 지박령 연구기안서 중에서 발췌 (0) | 2017.10.24 |
렉터 박사의 15번째, 어느 로펌 사무실 세절기 안에서 발견된 편지 중에서 발췌 (1) | 2017.09.24 |
렉터 박사의 14번째 소비자보호원 바닥에 널부러져있는 편지 중에서 발췌 (3) | 2017.09.17 |
렉터 박사의 13번째 국제기록보관소에 영구보존된 편지 중에서 발췌 (2) | 2017.09.16 |
렉터 박사의 12번째,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한 컴퓨터에 바탕화면으로 설정된 스캔본 편지 중에서 발췌 (0) | 2017.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