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많이 불던 날이었습니다.
티비에서는 태풍이 접근 중이며 약 이틀 후 제주도를 빗겨갈 거라는 보도가 있었지요.
마침 당시에 저는 평소 사모하던 짝녀와 운좋게도 제주도를 여행하던 중이었고, 그녀와의 산행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바람 불어 시원하니 상쾌한 산행이 될 것 같더군요.
제 강인한 체력과 남자다움을 보여주고자 한라산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다는 왕관릉을 타고 넘는 코스를 선택했습니다.
관음사를 떠나고 용진각 대피소도 막 지나자 그녀가 왜 이런 좆같은 길로 왔느냐며 저를 타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짜증이 나서 그녀를 돌로 쳐죽이고 싶었지만 감정을 추스리고자 그녀에게 잠깐 쉬다 가자고 제의했습니다.
한참을 걸어왔다보니 출출하기도 하여 라면을 끓이기로 했는데 바람이 꽤 강해 버너를 켤 때마다 불꽃이 춤을 추다 이윽고 꺼져버립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연락소 창고가 하나 눈에 띄었습니다.
창고 안은 외풍이 간간히 들이치긴 했어도 불꽃은 안정적으로 푸른 빛을 뿜어댔습니다.
라면 봉지에 인쇄된 설명서를 보니 550cc(3 컵 정도)의 물을 넣은 후 어쩌구 저쩌구...
세 컵 정도라는 건 어떤 체적의 컵으로 세 컵을 일컫는 것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습니다.
단위를 바꿔서 생각하면 550㎠의 체적을 가지고 있는 컵을 준비하는 게 우선이었어요.
급한대로 제 배낭에 들어 있던 곡선형의 컵을 꺼내 함수를 구하고 적분을 끝냈습니다.
그걸 해결하고나니 두 번째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설명서에는 4~5분 정도 물을 끓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산은 평지보다 저기압이므로 물의 특성상 압력이 낮으면 물분자들을 묶고 있는 힘이 약해져 섭씨 백도보다 낮은 온도에서 물이 증발합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백도에서 끓는 물이 산에서는 그보다 낮은 온도에서 끓기 시작하므로, 가령 산에서 밥을 지어먹을 때에는 밥뚜껑 위에 돌을 얹어 일정한 압력을 유지시켜줘야만 밥이 잘 익게 됩니다.
결국 그 날의 일기예보를 반드시 들어두어야 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오늘은 970밀리바의 저기압이 한반도를 감싸고 있으며 오후 쯤에 비가 내릴 가능성이 크오니 우산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일기예보가 됐다면, 라면 봉지에 쓰인 4~5분 정도 끓이라는 말은 표준대기압, 즉, 대기압이 1.033kg/㎠일 때를 가정하여 써둔 것이므로 kg/㎠ 단위환산을 함에 있어 1bar=0.9869kg/㎠이므로 이것을 이용하여 단위를 kg/㎠로 바꾼 후, 위에서 언급한 표준대기압보다 압력이 작으면 냄비 위에 좀 더 압력을 가할 수 있는 무언가를 올려두고 그렇지 않다면 끓이는 시간을 줄이는 방법으로 라면을 끓여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물 500cc(3컵 정도)를 끓인 후, 면과 분말, 건더기 스프를 같이 넣고 4~5분 더 끓이면 얼큰한 소고기 국물 맛의 라면이 됩니다...라는 설명을,
물 550cc(10cm x 10cm x 5.5cm의 사각형의 용기에 들어가는 양)를 끓인 후 면과 분말, 건더기, 스프를 같이 넣고 4~5분 끓이되 이것은 표준대기압(1.033kg/㎠)을 가정하여 산출한 시간이오니 오늘의 일기예보를 들으시고 1bar는 0.9869kg/㎠을 참고하셔서 도출되는 오늘의 대기압 값이 표준대기압보다 높으면 냄비 위에 압력을 가할 수 있는 것들을 올려두시고 그렇지 않으면 위에서 말한 4~5분 정도 끓이는 시간을 좀 더 줄여서 끓이면 얼큰한 소고기 국물 맛의 라면이 됩니다...라고 바꿔주어야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라면을 다 끓인 후 냄비를 들고 나가보니 칠흙같은 어둠이 주위에 깔려있었습니다.
시간은 이미 여섯 시간이 지나있었고요.
라면 냄새를 맡고 다가온 수백 마리의 늑대들이 안광을 발하며 제 주위를 맴돌았습니다.
그들의 눈빛에 압도되어 죽음을 직감한 저는 산을 미친듯이 뛰어내려가던 도중 피골이 상접한 채 아사한 그녀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제 뒤를 좇던 늑대들 때문에 시체를 수습할 겨를도 생각의 여유도 없었습니다.
하산 직후 기관에 신고하여 대대적 수색이 이루어졌지만 끝내 시체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서둘러 서울로 돌아갔습니다.
라면 회사에 연락을 취해 피해보상을 담당하는 직원을 만나기로 하고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한 후 채비를 마치고 시간 맞춰 장소로 나갔습니다.
5분 늦게 나왔더군요.
정말 머리 끝까지 화가 났지만 저는 가까스로 감정을 다스리고, 저같은 피해자가 더 등장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며 순조롭게 대화를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사람 하나가 굶어죽은 일이기에 단발성으로는 끝날 수가 없던 일이었습니다.
다음 약속을 잡고 헤어졌고, 그 직원의 지각에 대한 심각성을 일깨우고 그 자세를 고쳐주기 위해 저는 다음 약속에 5년 늦게 나갔습니다.
그 직원은 지각을 넘어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라면 회사에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 직원은 더이상 그 라면 회사에 근무를 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 5년의 세월 동안 모든 대인관계와 끊고 일념을 바쳐 오로지 라면 설명서에 대한 연구만 해왔기에 지금의 저는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 어떤 상황에서건 어떤 장소에서건 정상적인 라면을 끓이기 위한 A4용지 500장 분량의 설명서를 완벽히 작성할 수 있었고 그만큼 라면에 대한 제 열정과 사랑은 커져만 갔습니다.
저는 들뜬 마음으로 다시 그 라면 회사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재직 중이던 연구소에는 이미 제 사직서가 수리된 직후였지요.
라면 회사 인사과에 가서 제가 작성한 설명서를 보여드리며 정식 입사를 요청했습니다.
어느 여성분께서 몇 장을 읽으시더니 바닥에 패대기치며 저에게 온갖 모멸감을 주면서 내뱉은 “미친 시팔련”이라는 한 마디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옛날 제 짝녀를 떠나보낸 피해자이자 소비자의 권리를 지니고 있는 힘 없는 소시민입니다.
조아라라는 이름이 쓰여진 명찰을 달고 있던 그 여성분을 이 편지를 통해 소비자보호원에 고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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