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이 마른 땅을 적실 때, 소나기가 지나가고 나는 왠지 모를 상쾌한 흙내음.
이를 바로 페트리코라고 부릅니다.
토양세균 중 하나인 방선균이라는 세균이 물과 만나 분해 되어 공중으로 퍼지는데 이때 분해되어 나온 물질이 지오스민이라는 물질이자, 흙냄새의 정체인 것이죠.
지오스민은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안전한 물질인데, 우리는 지오스민 냄새를 맡으면 대단한 안정감을 느끼게 되고 대자연의 품에 안긴듯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 특유의 작용 때문에 조향사들이나 포도주 주조사들이 종종 사용하는 향이기도 합니다.
공기 중에 5ppt(part per trillion)만큼의 지오스민만 있어도 인간은 그 냄새를 감지 할 수 있는데, 이는 물로 가득 채운 올림픽 규격의 수영장에 한 방울도 채 되지 않는 양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백상아리가 1 키로미터 떨어진 곳의 피냄새를 맡는 것보다도 4배나 뛰어난 후각능력입니다.
그래서 마시는 물에서 아주 극미량의 흙내도 우리는 귀신같이 잡아 낼수 있는 것이죠.
독성이 전혀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 흙내음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그 누구도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90년대 후반, 제가 애용하던 두 시간 반짜리 유나이티드 항공의 오헤어-솔트레이크 구간은, 아침 비행기의 경우 팬케익이 핫밀로 항상 제공되었습니다.
그 구간을 우기인 5월에 이용하면 항상 그 흙내음을 맡을 수 있었죠.
다른 기간에 비해 그때는 유독 승객들이 굉장히 편안한 표정으로 팬케익과 커피를 즐겼습니다.
2001년 9월 4일,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기 일주일 전, 승무원들의 안전수칙 안내 직후에 화장실을 급히 다녀오게 됐습니다.
자리로 돌아와보니 당시로서는 전혀 보편화되어 있지 않았던 태블릿 형태의 기기가 하나 놓여져 있더군요.
누구로부터도 자신의 것이라는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기기의 하단에는 델파이라는 글자가 세겨져 있었습니다.
델파이의 화면에는 바로 일주일 뒤인 11일 맨해튼 풀턴에서 비행기 충돌과 건물 붕괴로 인해 2977명의 사망자가 발생할 것이라는 메시지가 출력되었습니다.
911 테러로부터 1년여의 시간 동안 지나면서 한 커뮤니티를 통해 그와 같은 단말기를 얻게된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들과는 일종의 묵시적 임무를 지닌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어느 깊은 가을 밤, 저는 동료들과 함께 리스본이 머물 때였습니다.
리스본 북동쪽에 위치한, 유럽 최장거리의 바스쿠 다 가마 다리를 폭파시키는 게 우리들의 첫 임무였죠.
우리가 유발한 폭발로 인해 151명이 죽었습니다.
그 다리는 다음 날 아침 출근 시간대에 무너져 2330명 죽게 될 예정이었습니다.
우리는 151명의 목숨을 빼았았지만 죽을 예정이었던 2179명의 목숨을 살린 겁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우리는 경찰에 쫓기게 되었죠.
다리가 폭파되고 엿새 동안 우리가 인지 혹은 예측하지 못한 대규모의 사고들이 세계 각지에서 터졌습니다.
그 사고들은 생사의 경계를 무너트리는, 경찰들이 우리를 쫓는 일을 잊어버릴 정도의 불가항력적이고도 기이한 현상이었습니다.
먼저 다리를 폭파시킨 당일 밤부터는 전리층의 곽란 현상이 도드라지게 나타나면서 푸른색의 오로라가 발광하는 듯한 현상을 전세계에서 쉽게 관측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동틀 녘이나 해 질 녘에 일반적으로 붉게 산란하는 태양빛은 이제 푸른색으로 바뀌어버렸죠.
그리고 그날 밤에 단말기에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출력되었습니다.
장소가 명확하지 않은 메시지는 처음이었습니다.
time: within a week
location: earth
fatalities: everyone else
cause: earth
다음 날 아침에 일본 구마모토의 히고은행과 주변 건물들이 전소되었습니다.
무언가 정상적이지 않은 화재였죠.
그 건물에서 일어난 화재의 불꽃은 흰색이었습니다.
대여섯 블록 떨어진 곳에서도 그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고, 건물의 철재와 콘크리트가 용암처럼 녹아내리고 있었습니다.
화마는 건물 내 134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대류권 저고도에서의 전리 현상으로 건물과 그 일대에 내려앉은 마그네슘 분진이 방선균의 외생포자와 충돌하여 발화를 일으킨 게 원인이었습니다.
일본에서의 화재 직후부터, 자신들이 평생에 걸쳐 여우 떼의 추적을 당해왔다고 주장하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인터넷 곳곳에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국적은 140개가 넘었고, 거의 같은 시간에 동시다발적으로 영상이 게재되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마그네슘 분진 흡입에 의한 일시적인 정신착란과 섬망 증상에 의해 초래된 행동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지만, 여우를 목격했다는 집단적 공통 광기에 대해서 그 누구도 답을 내놓지 못했죠.
그 영상이 게재된지 6일이 지나기 전에, 영상이 게재된 모든 지역에서 발화된 흰색 화염은 인간이 살았던 문명의 흔적을 그 땅에서 완전히 녹여버렸습니다.
몇몇 도시들에서는 폭우가 내렸지만 화염에 닿기도 전에 그 열기로 인해 증기로 날아가버릴 정도였죠.
델파이는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방식의 네트워크에 물려있지 않은 상태에서 멀웨어가 니들캐스트를 통해 백업 위성으로부터 비주기성 메시지를 일방향으로 수신하는 태블릿 형태의 단말기입니다.
이 기기는 어느 날 갑자기 저를 포함한 무작위의 사람들의 여객기 좌석, 침대 머리맡이나 며칠 간 이어 읽어온 책 위나 서류 가방 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떠한 사고로 몇 명이 죽을지에 대한 메시지가 하루 이틀 간격으로 수신되며, 거기에는 수신된 날짜로부터 약 일주일 후에 일어날 수 건에서 수십 건의 사고가 목록화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불타기 전에 깨닫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재앙은 멸종을 목적으로 시작되었고, 불가항력적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 메시지들은 그저 누군가는 숙명대로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지, 누구더러 그들을 구하라고 당부한 게 아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통신의 발달은 인류에 가파른 발전을 가져가줬지만 그것은 인류가 타의에 의해서 멸종당할 가장 큰 실수라는 것을 처음에는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통신 신호는 우리 지구에 생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간이 직접 도달할 수 없는 아득히 먼 곳 구석구석까지 알린 셈이 된 것이죠.
신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신을 대체했다고 자부하던 그때에 인간의 기술을 아득히 뛰어넘는 존재는 인간 생사의 경계를 무너트렸습니다.
언젠가 렉터 박사가 이런 우주를 관측한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지구상의 유기물이 생명을 만들어낼 시도를 무한번 반복하다가 결국 포기한 우주가 발견되었다고.
그런 지구보다 그래도 찰나에 생명이 존재했던 우리 지구가 더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제우스는 델파이;델포이 신전에서 거인족인 기간티스와 신들 사이에 전쟁이 있을 것이라는 신탁을 받았습니다.
델파이 단말기는 거인족의 출현을 예고한 적은 없지만, 인간이 육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극히 작은 방선균이 결국 스스로를 신이라고 자부한 인간을 무너트린 기간티스가 된 셈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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