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얼마나 빨리 자라는지 이야기해 볼까요.
언제나 아이들은 부모가 신경 쓰이게 자꾸만 주변을 맴돌곤 합니다.
그런데 쓸모가 생겨서 아이들을 부를 때쯤이면 아이들은 다 자라서 집을 나가고 없죠.
내가 살던 세상은 냉전이 끝나지 않아 물리학이 거듭 발전해 몇 개의 평행우주와 상호교신이 가능하면서 물질의 치환도 가능한 세상이었습니다.
다만 사람이 계속 죽어나가는 세상에서 의학은 유의미한 발전은 없더군요.
나는 언젠가 골수암에 걸린 아들의 신진대사를 정지시키고자 시간의 흐름이 무한대로 느려지는 아공간에 넣어둔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공간의 항상성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발생한 아공간 속의 균열을 점검하다가 나는 예상치 못하게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천주교가 존재하지 않고 이슬람교가 과학과 상보적 발전을 거듭해 의학적 기술이 굉장한 수준에 이른 세상이었습니다.
다만 물리적으로 계산이 되지 않는 오차율이 존재했고, 일반 상수를 대입하여 차원 도약을 시도했을 때에는 알 수 없는 곳에 위치한 활단층으로만 좌표가 매번 지정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물리학계의 거장 월터 노이만 박사의 도움으로 브룬 상수로 도약을 시도해본 결과, 모든 인류의 하루 일과가 호랑나비를 유인하여 쓰다듬는 걸로 시작해서 민달팽이를 흉내내다가 잠자리에 드는 세상이 나타나거나, 강렬한 붉은 빛이 대지를 비춘 후부터 도로에서 간헐적으로 우유사탕이 자동 생성되어 그것을 먹기 위해 몰려든 온갖 동물들로 인해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세상이 나타나거나, 전파와 유기체가 통과할 수 없는 강력한 자기장이 세상을 절반으로 나눠서 김정은과 트럼프가 영영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세상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다시는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게 매 실험의 결론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월터 노이만 박사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각운동량을 2% 올린 채로 도약을 시도하니 실재성과 국소성이 동시에 존재하지만 -어디까지나 우리의 기준에서- 비교적 정상적인 세상을 발견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달을 실제로 보고 있는 경우에만 달이 존재하게 되는 점을 제외하고서는, 내가 살던 세상에서의 물리학 발전 수준, 그리고 환경이나 조건에 근접한 세상이었고, 내가 살던 세상과 물질의 치환도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세상을 떠나기 전 월터 노이만 박사의 천재성을 경하하며 내가 살던 세상에서 흔히 사용되던 터널 건설기인 산화요오드 레이저 천공기의 설계도를 그려 선물로 건내었습니다.
이윽고 나는 바로 그곳에서 오일러 각도를 추가하여 생성한 포탈을 통해 원래의 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40년이 지나 돌아온 내 세상에서는 여전히 냉전이 진행 중이었고, 내 짝녀인 정쌍녀 여사는 어려운 가운데 돼지국밥집을 계속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세상에서 배운 의학기술을 바탕으로 나는 내 세상의 의학을 진일보시켰습니다.
의사들은 골수암 따위는 쉽게 정복해버렸고, 전쟁통에 죽은 사람들마저 모두 되살리는 바람에 전쟁이 무의미해져서 종전까지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난치병이나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이 언제 가능할지 모를 치료를 기다리며 아공간에서 기약 없이 허송세월을 보낼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선 내 아들은 건강히 자라주었고 천주교 사제가 됐었구요.
여성 신자들로부터 큰 인기도 구가하여 여러 차례 에이즈나 매독에 걸리기도 했지만 치료를 받고 갱생한 후 사제직을 관두고 또래의 여인과 백년해로를 맺었습니다.
그동안 많이 늙은 나는 수음을 할 힘조차 없어서 집구석 방바닥에 널부러져 있지만 아들을 이제는 쉽사리 부를 수도 없고 신경을 쓰고 싶어도 더이상 쓸 수 없을 정도로 내 아들은 바쁘게 지내고 있답니다.
더군다나 아이들은 항상 내 아들이 신경이 쓰여 미칠 정도로 내 아들의 주변을 맴돌고 있죠.
내가 내 아들의 똥기저귀를 갈아주던 때 느낀 피곤과 짜증을 내 아들도 똑같이 느끼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내 아들의 아이들이 아이들을 낳을 즈음, 내 아들도 아이들의 똥기저귀를 갈던 그때로 기꺼이 돌아갈 수 있다고, 가끔은 간절히 그러고 싶다고 나처럼 생각하지 않을까요.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은 찰나였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짧디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내 아들과 내 아들의 아이들은 내가 내 아내와 함께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일종의 흔적일 것입니다.
추신 1.
비대칭성 붕괴가 이루어진 차원의 틈에서 관측된 월터 노이만 박사의 세상은 산화요오드 레이저포가 개발되어 큰 전쟁이 일어났더군요.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될 비극적인 일이지만, 참 기쁘게도 월터 노이만 박사는 한 국가와 군대를 진두지휘하는 총통이 되어 국가간 전면적인 섬멸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나의 40년지기 친구, 월터 노이만 박사의 건승을 기원하며 이 편지를 줄입니다.
추신 2.
나의 세상에서는, 전쟁을 통한 긴장의 유지로 과학의 발전이 가속화된다는 장점을 유지하고자 여러 국가의 연방정부는 자아를 상실시킨 인원들이 예속된 영원히 부활하는 군대를 꾸려 접경지에서 전쟁을 다시 발발시킬 일종의 제도를 준비 중입니다.
물론 이는 일반 대중들에게는 실제 국가간 대립이라는 프로파간다로 진행될 계획이죠.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편지를 통해 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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