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다양한 종류의 메스칼, 위스키, 럼은 물론이고 인퓨징된 증류주나 멕시코산 아과르디엔떼를 즐기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슈터 방식으로 마시는 마르가리따라든지 소코 등의 소프트한 칵테일 역시 같이 찾게 되더군요.
소코는 복숭아 향이 나는 위스키 기반의 증류주와 콜라를 섞은 것입니다.
칵테일 종류 중에선 제가 좋아하는 다섯 가지 중 하나죠.
최근에는 맥주를 제외한 술을 더이상 즐기지 않게 되어, 찬장에 쟁여둔 젊은 백포도주와 데낄라는 아마 몇 년 동안 바닥을 보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최근 몇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지독하게 외로워지더군요.
출구가 보이지 않는 컴컴한 터널 중간에 서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좀 더 젊을 때야 친구들을 동원하여 위태로운 무력감이나 충분치 않은 감정을 메우기도 했지만 이제는 곁에 아무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아니, 달리 말하면 제가 그들 곁에 남아있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휴대폰을 붙잡고 한참 이어진 통화들,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주고 받았던 메시지들, 많은 시간을 들여 긁어모은 옛 사진들을 들여다보는 것, 급기야 혼자일 때 밥을 굳이 챙겨먹는 것 또한 이제는 명확히 무의미한 일들이 되었습니다.
타인들 곁에 남아있지 않는 것 역시 어떤 특별한 의미를 만들 이유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제는 섹스도 필요하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매순간 제 인생이 저를 강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정리하고 잊게 만드는 것, 다시 회고하지 않게 해주는 것, 내가 잃어버려 다시 쥘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과 연연을 끊어주는 것, 그리하여 제 자신과 독대하여 소리 없이 조용히 대화를 하게 해주는 것, 이런 것들이 저에게는 외로움의 순기능이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외로움에도 순기능이 있다고 얘기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미온적이고 파상적인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벌써 십년이 다 되어가는 얘기입니다만, 저는 예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어느 날 철야근무로 퇴근을 못한 채 사내 수면실에서 잠을 청한 적이 있습니다.
인중에서부터 입으로, 또 목으로 전해지는 뜨끈한 느낌에 눈을 떠보니 코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코피가 대수롭기 보다는 그걸 닦아내느라 잠잘 시간을 단 몇 분이라도 뺏겼다는 생각이 짜증으로 이어질 때 갑자기 번뜩, ‘다음 날 일어날 수 있을까? 과연 내가 살아있을까?’라는 생각이 든 적 있습니다.
하지만 과로에 찌들어 생각을 더 잇지 못한 채 잠에 빠졌고, 일어난 다음에는 더이상 정주하지 말고 사직서를 내자고 결심을 했습니다.
요즘 들어 부쩍 연락을 자주 하게 된 친구가 있습니다.
젊을 땐 더러 난교도 함께 즐긴 못볼 것까지 다 본 꽤 친했던 사이인데, 결혼과 동시에 그런 생활을 거짓말처럼 청산해서 배신감이 든 적이 있었죠.
그 친구가 몇 달 전 직장을 관두었습니다.
저는 퇴사할 당시 그 친구를 만나 스타벅스에서 더블샷을 마시면서, 회사에서 코피를 흘리며 했던 그 생각을 고스란히 전했었는데, 그 친구는 쉽게 동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그 친구가 퇴사를 준비하면서 그제서야 제가 했던 그 말이 와닿더란 말을 하더군요.
지금은 자영업을 하며 업무에 할애하는 시간이 직딩 시절보다 많이 줄었지만 나이가 들다보니 피곤한 것은 매한가지라고 합니다.
친구는 잠시간 텀을 두다가 자신이 겪은 이상한 일에 대해 얘기를 이어갔습니다.
며칠 전 밤에 자양강장제, 수면제, 안정제를 같이 복용을 하고 잠들었다가 깨어보니 이틀을 내리 잔 상태였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전날은 오전에 물류창고에 반드시 물품 입고를 마쳤어야 했고, 오후에는 중요한 유통 포럼에도 참석을 꼭 해야만 했던 날이었던 거죠.
무엇을 어디부터 수습을 해야할지를 몰라 우왕좌왕 하면서 물류 관리 페이지에 접속을 했는데, 이미 전날 물류 입고를 잘 마쳐 정상적으로 제품이 등록되어 있었고, 책상에는 여러 서류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놓여져 있었습니다.
포럼에도 나가서 서류를 주고 받는 등 전반적 업무를 다 마무리 지어둔 상황이었던 겁니다.
다만 당시 만났던 사람들이 친구에게 말하길, 평소의 차분한 모습과는 많이 다르게 격앙되어 있었고 짜증과 화를 중간중간 내기도 했었다는데, 친구는 그 하루가 통채로 인생에서 사라져버린 것 같다고 합니다.
아주 작은 단 한 조각의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고요.
저는 그 친구가 중병에 걸린 건 아닌지 겁이 나서 당장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으라고 종용했습니다.
그날 저는 베게를 베고서도 그 친구에 대해 한참을 생각하다가 아주 늦게서야 잠들 수 있었습니다.
친구는 자기도 겁이 난다고 했습니다.
친구는 예전에 비해 조금 더 시간의 여유를 벌었지만 큰 것을 최근에 잃었습니다.
가족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이제 의미를 지니고 살아갈 이유를 놓쳐버릴 것 같다고 합니다.
위안을 주고 받을 오랜 친구가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친구 말마따나 저 역시 밤새도록 말술을 같이 퍼먹을 친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저는 어릴 때 그 친구를 포함한 몇몇 친구들과 함께, 나중에 자급자족하고 함께 품앗이도 하면서 공동체 마을을 꾸려서 살자고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눈 바 있습니다.
그 친구가 넌지시 그걸 끄집어내면서 아직 유효하냐고 묻는 걸 보면 그런 뜬구름 정도로 끝났던 얘기들을 구체화해야 할 때가 된 것 같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은 누군가의 관심을 먹고 성장합니다.
관심을 기울여주고 반대로 관심을 갈망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내재된 인간의 기본 성향으로,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관심을 주고 받아야 하는 일종의 책임도 지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외로움은 하루 담배를 한 갑씩 피우는 것과 같고, 비만보다 위험하며, 유의미한 수치로 치매 발현률을 높입니다.
그런데 그런 관심병을 앓고 있지 않고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들은 진작에 정신이 죽어버린 망자들입니다.
그러나 정작 여러분들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저는 제가 가진 것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사실을 알게 된 날, 이 지옥같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면 현실같은 지옥일까요?
이게 매트릭스가 아닐까, 하도 심심해서 누군가의 인생을 체험하는 완벽한 현실성을 갖춘 게임을 내가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대체 언제 이게 끝날까 하는 허무맹랑한 상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게 매트릭스인지, 아니면 정말 현실인지는 아직 분간이 되지는 않는군요.
뭐가 어찌되었건 저는 이제부터 여러분들을 차근차근 일깨워주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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