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괜찮아지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실제는 바람과 크게 달랐습니다.
마치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것처럼, 사람들의 숱한 만남의 뒤에는 짱깨폐렴이 늘 따라다니며 점점 더 많이, 더 멀리 퍼지고 있었습니다.
같은 동네 주민이 짱깨폐렴으로 죽었다는 소식은 얼마 전만 해도 저하고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일이었죠.
짜파게티를 먹을지 짜짜로니를 먹을지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1989년의 쌀쌀한 가을, 부모와 함께 서울대공원에 갔다가 원숭이 두 마리가 서로 껴안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모에게 저들이 왜 서로 껴안고 있는지 물었죠.
부친은 “추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모친은 “따뜻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의 대답처럼 원숭이들은, 날씨가 “추워서”, 그리고 체온이 “따뜻해서” 끌어안고 있었겠죠.
그해 11월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북한발 삐라는 그전에도 서울 곳곳에서 드물지 않게 주울 수 있었는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부터 더 많아지더군요.
삐라를 보면서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자주 하곤 했습니다.
정말 북한 사람들은 북한을 삐라에 자주 쓰인 말처럼 지상락원이라고 믿고 있을까.
그렇다면 구태여 진실을 아는 것이 좋은 일일까.
그저 믿으며 살다가 죽는 편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답을 찾기는 순탄치 않았습니다.
인식론과 유물론을 알게 된 후에도, 공리주의와 의무론적 도덕관의 차이를 배운 후에도, 수음하는 방법을 스스로 깨우친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진실을 외면하는 태도가 옳지 않다고 지적할 수는 있어도 그게 나 자신의 삶이라면 과연 그 진실을 선택할 수 있을까.
그냥 이대로 살게 놔두라고 되려 짜증을 내지 않을까.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원숭이 두 마리를 보는 부모의 사소한 인식 차이에서부터, 상호보완의 메커니즘을 인정하지 않고 국가의 분열과 전쟁을 초래하는 인간의 배타성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은 인간을 진정 인간답게 만드는 인간의 근본이며, 피로 뒤덮힌 역사이자 미래입니다.
나는 이따금 인간이 언젠가는 이타성을 갖게 될 것이라는 상상을 해왔습니다.
상상에서 그치지 않기를 바랄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짱깨폐렴은 인간의 선천적 악함과 배타성에 대한 민낯을 완전히 드러내어주었습니다.
차별, 증오, 분노, 혐오, 폭력...
인간들은 온갖 전쟁을 통해 자신과 타인을 느낍니다.
전쟁이 없을 때에는 스포츠를 동원하죠.
지금처럼 스포츠를 즐기기 여의치 않을 때에는 누군가를 혐오합니다.
생애의 아름다운 시기 대부분에 걸쳐 증오와 분노의 전쟁을 치르다가 결국 무기력한 채 자신감을 잃어가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배우자와 자식들조차도요.
그 모든 과정이 끝나면 드디어 해방됩니다.
아름다움으로부터 말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성교를 하고 싶어하지 않는 비참함을 맞이하죠.
우리는 장차 교과서 속 밑줄이 그어질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아무도 가보지 못했던 폭풍우가 몰아치는 길을 우리가 걷고 있습니다.
이 폭풍우를 이겨낸 후에는 절대 바뀌지 않을 것 같았던 것들이 바뀌어버린 세상에서 살게 될테죠.
그런데 장막을 들추고 바라본 어둠의 저편에서도 당신은 바뀌지 않더군요.
나는 아름다움에서 해방되고나면 좀 더 솔직해진 세상에서 표석공으로 여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그럼 당신이 죽고나서 당신의 묘비에 이렇게 새길 수 있을테니까요.
𓂸가치 없는 한 남자가 떠났습니다.𓂺
그의 인생은 무의미했습니다.
그는 목적 없는 삶을 좇았고 세상에 어떠한 이바지도 한 것이 없으며 그저 몸에 기생충을 키우던 고깃덩어리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세상에 기여한 것은 오로지 자신의 피를 거름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준 것 뿐입니다.
당연하게도 아무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렉터박사의 살인사관학교 > 서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 데이빗 박사의 3번째, 유럽입자물리연구소 양자체인에 저장된 기록 중에서 발췌 (1) | 2019.03.14 |
---|---|
렉터 박사의 18번째, 헛간 장작 더미에서 발견된 편지 중에서 발췌 (1) | 2018.10.05 |
렉터 박사의 17번째 화재로 전소된 프록시마 센타우리 빅데이터센터의 패닉룸에서 발견된 편지 중에서 발췌 (0) | 2018.09.25 |
51구역 군사기지 출입관리사무소에서 발견된 노트 (0) | 2018.09.09 |
렉터 박사의 16번째 편지 전문 (2) | 2018.06.13 |
렉터 박사 인터뷰 전문 (2) | 2018.04.23 |
댄지어스 박사의 실험일지 #004:물리적 형태를 지니지 않은 지적존재(!)의 시대 (0) | 2018.03.26 |
댄지어스 박사의 실험일지 #003: 형태장 이론 (0) | 2017.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