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바람이 무겁게 훑어대는 논 길가 튼튼한 오두막에서 나는 쟁기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뱃살 빼는데 효과가 있다는 말을 듣고나서부터 해오던 아사나의 한 자세다.
동네 영감들 삼삼오오 모여 비워낸 막걸리 통 두어 개가 내 옆에 굴러다닌다.
누군가 지나가다가 잠시 멈춰 서는 게 곁눈으로 보였다.
구부정한 허리로 슬금슬금 걷고 있는 게 동네 노인인듯 하여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낑낑대고 있는데 그 편에서 외마디가 날아왔다.
이마에 메마른 땀을 스윽 훔치며 나를 보더니 말을 이었다.
"휴가라 좀 먼 동네로 놀러와 쉬고 있습니다. 어르신이든 이 마을 다른 어르신들이든 가을걷이 끝나면 한동안 쉬시지 않습니까? 지금 휴가 온 저처럼 말입니다."
"에잉 젊은이가 도리를 모르는구만. 세상사나 사람 일에는 도리가 있는 법일세. 이치가 있고 도가 있어야지. 게다가 이렇게 작은 마을에 놀러와서 남의 논바닥, 남의 오두막에서 휴가를 보내겠다면 말이지. 적어도 동네 이장 집에나 가서 술 한 잔 올리고 인사 드리는 게 예의는 아닌가? 내가 촌구석에 틀어박혀서 한 평생 살았지만은 도리는 알고 있단 말이야. 젊은이같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면서 도시물을 들여놓으니 이 동네 젊은 년놈들도 등 굽어가는 제 부모 다 팽게쳐놓고 도시물 좀 빨아먹어 보겠다고 죄다 도망나가버리지."
"그럼 노인장께서는 도를 아십니까?"
"암, 알다마다. 젊은이는 도가 뭔지 아시는가?"
"물론 저는 도가 뭔지 모릅니다. 노인장께서 도를 아신다면 제가 일보일딸을 하고, 노인장께서 도를 모르신다면 노인장께서 삼보일딸을 하는 건 어떨런지요? 내기로 말입니다."
"그럼세. 어디 한 번 들어보겠나?"
"노인장, 도는 입으로 도를 논하는 순간 그것은 도가 아닙니다."
노인은 한 순간 얼굴이 흙빛에서 똥빛으로 변하더니 마치 방금 일이 없었다는 듯 그대로 제 갈 길을 재촉하였다.
몇 해가 지난 후 산등성이가 빨갛게 익어갈 무렵, 나는 그 마을의 초입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 중년에게 그 노인의 생김새를 설명한 후 그 노인의 안녕을 물었다.
노인은 몇 해 전 여름부터 집 구석에 틀어박혀 한참을 나오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마을 어귀에서 어기적거리며 나돌아다니는 것을 마을 사람 몇몇이 목격을 했는데 삼보일딸을 하다가 아랫도리가 문드러져 김치국물을 잔뜩 쏟더니 그 자리에 쓰러졌는데 깜짝 놀란 마을 사람들이 노인에게 뛰어가 노인을 흔들어대자 노인은 "나는 도를 알지 못 한다" 등의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몇 마디 하다가 즉석에서 숨졌다고 한다.
나는 그때 무더운 여름날 노인이 마시고 싶어하던 막걸리를 생각하여 막걸리를 한 통 사다가 노인이 묻혀있다는 묘자리를 찾아갔다.
막걸리 뚜껑을 따서 단숨에 들이킨 다음 노인이 갈구하던 도리에 부응하고자 남은 한 방울을 노인의 묘자리에 부어주었다.
그 노인은 이미 이 세상에는 없는 망자이지만 세상사나 사람 일에는 도리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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