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과학의 도약으로 문명 발달의 쾌거를 이룬 후부터 사실상 경험해본 적이 없는 미증유의 상상을 초월하는 재해가 닥쳐올 것이라고 일각에서는 경고하고 있다.
전쟁이나 범죄 같은 비극은 상상력과 상상력의 결여 두 요소로 인해 발생하지만 재해는 상상을 하건 말건 평등하고 무자비하게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다.
밤길, 차에 치이는 야생 고양이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왜 자동차 불빛에 매료되어 도망가는 걸 잊어버리고 멈춰있는 걸까 라는 의견을 누군가 제기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질문은 질문 자체에 오류가 있다.
그들은 본래 도망치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되는 위험한 물체다 라는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물은 생물이 가진 큰 특성 중 하나인 호기심에 동해 익숙지 않은 대상에 강렬하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다.재해 심리학이라는 분야는 금세기 초엽에나 겨우 주목받기 시작한 시대다.
재해를 앞둔 상황에, 근대사회의 큰 문제점 중 하나가 위험에 코 앞에 닥친 사람들이 좀처럼 도망치지 않는 특징이다.
특히 물질문명이 발달한 사회에서 비대한 재산이 많아지며 풋워크를 무겁게 만들었다는 분석도 성립될 수 있지만 집단행동 시 가장 도드라지는 인간의 특질 그것은 곧 큰 소리를 지르고 평소와 다른 행동을 취하는 것이 '창피하다', '귀찮다'라는 심리.
그것이 집단 속에서 개인이 올바른 대피 행동을 취하기 어렵게 만드는 단순한 원인이다.
인도네시아 발리의 쓰나미 재해 당시, '해일 경보' 등이 정확히 발령됐는지에 대한 여부는 여전히 호불호가 갈리고 있다.
다만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자동차 경적 소리를 들었다는 경우는 여러 건에 달하며, 최초의 경적에 호응하듯이 무언가를 감지한 사람들이 자동차 경적을 울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울린 자동차 경적은 생사의 경계선상에 있던 사람들의 운명을 어느 정도 구하는 데에는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훗날 남겨진 다수의 현장 영상과 증언에서 밝혀진 가장 기묘한 사실은 멀리 쓸려가는 해안선, 그 경계에 서 있던 사람들일수록 대피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적었던 현상이다.
그 '쓸려가는 해안선'과 '그것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을 좀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사람들 중, 의미를 알 수 없는 정적에 올바로 위기를 감지한 몇몇 사람만이 '대피행동'에 나섰다.
단독, 혹은 2인조의 '소수'가 민첩하게 움직였다고 한다.
눈 앞에 해안선이 쓸려나가는 난생 처음 보는 현상에 글자 그대로 매료되어 있던 사람들이 그 시선의 각도를 몇 도 높여 해수면의 높이가 불가해한 형태를 띄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그리고 남겨진 영상 자료에는 비명이나 절규는 물론이고 재해가 시작된 시점에서도 웃음소리가 섞인 것도 많다.
인간이란 극한상태에 놓이게 되면 웃음을 터트리기도 한다.
비극이 일어나는 장소에는 그에 걸맞게 아비규환에 빠진 사람들만 있어야 된다는 것은 안전한 곳에 있는 사람들이 원하는 이야기일뿐 해일에 삼켜진 사람들도 영문도 모른 채, 혹은 웃으면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아주 많을 것이다.
진원지로부터 4천 킬로미터 거리의 발리는 지진 해일의 직격탄을 맞아 심각한 피해를 초래한 반면 인근에는 약간의 파도 수위 변동에 그쳤다.
또한 관광지라는 여건 속에서 미증유의 인적 피해가 발생한 것과 맞물려 물리적 손해도 막대했다.
해일은 해안선의 얇은 표면만 삽시간에 깊고 강력하게 도려낸 것이다.
정신적인 충격과 인적 피해의 규모에 비례하여 낙차가 거의 없이 크나큰 물적 피해를 입었던 상황은 인근 주민들 사이에 두 가지의 기묘한 특징으로 나타났다.
그정도의 대재해로 사람들의 충격은 컸고, 당연히 시시각각 갱신되는 뉴스에 모두가 예민하게 촉각을 기울였다.
망자들의 부재를 예를 갖춰 걱정하고 한탄하고 슬퍼한 뒤, 그래도 사람들은 사회적 직관과 합의에 따라 이 일상은 평범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 라고 판단, 절묘한 호흡으로 대재해란 이물을 꿀꺽 삼키고 내일도 변함없을 나날을 보내기로 암묵적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곳에서 일어난 대사건, 대재해, 지구상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전쟁, 대재해처럼 그곳 사회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모두가 동등하게 나눠 삼킨다는 암묵조건 하에, 그 사건을 아슬아슬한 선상에서 '남의 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인류가 지진을 관측하기 시작한 이래 전세계적으로 화산이나 지진의 지질학적 활동의 격차가 현저히 좁혀지고 그 빈도 역시 대폭 상승하고 있다.
좁게는 최근에 일어난 백두산 일대 역시 지진의 총계, 화산 활동의 규모에는 일정한 변동이 관찰된다.
하지만 지진과 화산의 인과관계는 여전히 확실히 증명된 게 없고 지진과 화산의 인과관계가 여전히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없다 라고 주장되어지고 있다.
번개와 비의 인과관계가 증명되지 않았으니 이 두 가지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없다 라는 것과 일맥하는 웃기는 짬뽕이다.
애당초 근대의 기상예보 즉, 수치예보가 성립된 시기, 수치예보가 성립되는 대전제, 관측자가 이곳에 있으면서도 다른 장소의 정보를 순식간에 알 수 있게 된 시기가 언제일까.
우선은 증기 기관차가 발명된 때는 19세기 초, 이로써 인류는 사실상 최초로 말을 타고 달리는 것보다 빠르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윽고 19세기 중엽에 전신과 전보의 발명으로 인류는 순식간에 정보를 끌어모아 읽고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먹으면 배탈이 나는 썩은 만두를 앞에 두고 만두를 그냥 갖다버릴 뿐이지 배탈 나는 구조에 대해 탐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설명되지 않는 원리에 쌍심지를 세우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렇게 쌍심지를 세운 사람들이 인정한 것만이 사회적으로 널리 통용되게 마련이다.
그런 권위를 학문 세계에서는 학계라고 부른다.
인간은 인간이 되기로 결정된 순간부터 본래 안식의 땅이었던 나무 위, 숲 속을 떠나 그것들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물만 있는 세계에 사는 것도 아니었고, 흙과 돌만 있는 세계를 고른 것도 아니었고, 늘 대지와 바다, 대지와 강이 충돌하는 장소를 골라 진화해 왔다.
이상하게도 늘 지질변동, 지각변동의 최전선을 선택하는 생명군은 인간이었다.
물머리 위에서만 번식하는 생명군, 흔히들 재해라 부르는 급격한 지질변동, 기상변동을 종 진화의 발화점으로 이용해온 경향이 있다.
물론 그 반면, 격심한 재해, 급속도의 진화 끝에 멸망한 사례도 있지만 문명이 멸망할 때는 한 가지 공통점이 관찰된다.
그것이 생명군의 시너지 저하이다.
시너지란 본디 시스템 이론의 용어인데 조직 내의 연계효율을 가리킨다.
낭비가 없고, 스트레스가 적고, 생산성 높은 것을 가리켜 시너지가 높다 라고 표현한다.
시너지 높낮이의 평가치는 다양한 기준치를 통해 과학적으로 산출할 수 있다.
문학적으로 말해 희망이 보이지 않는 세계, 혹은 비평가처럼 인간 정신의 황폐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다짜고짜 개인적 표현으로 일축한다면 바보 밖에 없는 구제불능의 세계라는 것이다.
특히 최근 20년 동안, 대지진이 발생해왔던 국가들은 물론, 근미래에 대지진이 발생할 것으로 확실히 예측되는 국가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시너지 저하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의 시너지 기준치 저하는 유엔 가맹국 192개국 중 최악의 열 손가락에 들어간다.
말하자면 일본은 그만한 숫자의 국민이 있는데도 아무것도 이루지 않는 정도가 실로 엄청나다는 것이다.
가령 미국이란 국가가 최근에 전쟁이라는 정치항목에 있어서 물론 시너지 기준치 설정 방법에 의문의 여지가 있다는 점도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통산 100명의 자국민 사망자로 타국민을 수십만 명 살육한다는 그 옛날 독일의 나치도 꿈만 꿨지 이루지 못한 고효율을 달성하고 있다는 점.
그런 고효율의 미국을 단일조직으로 무섭사리 시너지가 높다고 평가해야 할지 절망적으로 시너지가 낮은 애물단지 지자체로 봐야할지 머지않아 그 점의 설정 기준도 정해질 것이다.
각설하고 일본의 낮은 시너지는 거의 역사상 다양한 문명이 멸망할 때 보여준 수치과 맞먹는다.
생산성 저하, 출산율 저하, 정치경제 달성도 저하, 개개인 생명체의 의지, 의욕 저하, 범죄율 상승 등등 일본 사회의 시너지 평가체의 저하는 놀랍게도 국토 이변을 가리키는 수치와 추보식으로 하나하나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물머리 앞에서 번식하는 생명군은 자신이 서 있는 물머리가 곧 파도로 밀려올 때 무너질 것이란 것을 예감하고 절망하고 일찌감치 생명군이길 포기한다.
즉 문명 유지를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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