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입학할 무렵까지 사도 바오로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예수를 생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음에도 자신에 대한 엄격함을 유지하며 여러 서신들을 통해 많은 지역에 초기 그리스도교가 자리 잡는데 큰 공헌을 했던 사람이었다.
어거스틴은 바오로가 쓴 로마서 중 3장 12절을 읽고 회개하여 새 삶을 찾았다.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을 읽고 위대한 복음을 발견하고 종교개혁의 원천으로 삼는다.
칼빈, 요한 웨슬리, 칼바르트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오로의 서신을 통해 은혜를 받는다.
로마서는 물론 갈라디아서와 데살로니카 전후서에 등장하는 하느님이라는 존재의 속성은 범재신론자인 나에게 굉장한 흥미를 돋군다.
바오로의 교회관과 은사, 방언, 선교, 기도, 종에 대한 신학적 분석 등.
나는 충분히 바오로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구분할 수 있으리라 본다.
다만 헬라어를 전혀 모르는 게 아쉽다.
두나미스가 능력이라는 건 알고 있으니 전혀 모르는 건 아닌 걸까.
내가 바오로를 가장 존경했던 이유는 그가 했던 이 한마디 때문이기도 하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
그래서 나는 아사 직전의 상태에서 이 글을 적는 중이다.
엘 그레꼬의 사도 바오로(스페인 마드리드 쁘라도 미술관)
여담으로 현재 이 건물은 똘레도 대학교로 쓰이고 있는 건물인데, 원래는 델 눈씨오라는 이름의 정신병원이었다.
20세기 초반의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였던 그레고리오 마라뇬은 위의 사도 바오로의 모델이 이 정신병원의 환자를 모델로 삼았다고 주장했다.
각설하고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그림의 화가인 엘 그레꼬는 수르바란, 벨라스께스와 함께 스페인의 중세를 대표하는 3대 화가 중 하나다.
다만 이 3명의 화가 중 엘 그레꼬는 스페인 출신이 아닌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의 준자치지역이자 후기 비잔틴 양식의 중심지였던 칸디아 왕국의 영토 중에서도 현재의 그리스 크레타섬의 포델레(지금의 헤라클리온 지역의 가지gazi)에서 태어난다.
26살에 베네치아로 가면서 당대 최고의 거장이었던 티치아노로부터도 수학을 했고, 29살에 로마로 가서 공방을 열어 줄로 건축가이자 조각가로 활동한다.
34살에는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로 이주하여 왕정의 수석화가가 되기 위해 작품을 제출했으나 낙방하고, 36살에 똘레도로 이주하여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스페인 똘레도 산또또메 성당), 가슴에 손을 얹은 기사(스페인 마드리드 쁘라도 미술관), 옷이 벗겨지는 그리스도(스페인 똘레도 수석주교좌 성당), 베드로의 눈물(스페인 똘레도 수석주교좌 성당) 등 여러 대표작을 남기며 몰년 72살에 세상을 떠난다.
노인의 초상이라는 제목으로 그린 엘 그레꼬의 자화상(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본디 이름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지만 이탈리아어로 그리스인이란 뜻의 일 그레꼬il greco로 불렸다.
르네상스 이후 여전히 미술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에서 일 그레꼬라는 이름은 일종의 차별이었던 것이다.
스페인으로 건너가면서 그때 이탈리아어의 남성형 관사인 일il이 스페인어의 남성형 관사인 엘el로 대체된다.
그가 활동했던 16세기 당시, 실제 사람과 사물을 똑같이 표현하는 고전주의 사조가 대세였고, 화가들 사이에 캔버스 위의 묘사 실력은 정점에 달해 미술의 발전이 끝나간다는 우려가 만연해있던 때였다.
반면에 엘 그레꼬는 신체 비율을 10등신에 가깝고 머리가 작으며 사지가 가늘고 기다란 모습으로 묘사하여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엘 그레꼬의 이러한 시도는 16세기 말 매너리즘 사조로 발전하고, 훗날 입체파와 표현주의 화풍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근대 언어 예술의 거장인 보헤미아 태생의 독일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영감의 원천이 된다.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 앞 성바오로 조각상
바오로가 손에 들고 바라보는 무언가는 예외 없이 성경이다.
베드로의 상징이 열쇠라면, 바오로의 상징은 칼이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바오로는 성령의 칼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일컬었다.
바오로가 들고 있는 성경은 칼을 통해서 그 의미가 공고해지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바오로는 기둥에 묶인 채 칼로 참수를 당해 죽었다.
단순히 유대인이 아닌 로마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형으로 죽은 베드로와 달리 참수형이 집행된 것이다.
참수를 당했다는 사실은, 칼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그가 어떻게 순교를 했는지에 대한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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