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 전후로 나폴레옹 황제는 전유럽을 통치하려는 야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야망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수출이라는 원천으로 막강한 경제력을 유지하던 영국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압박하기 위해 포르투갈의 리스본 무역항을 폐쇄시켜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스페인 영토를 지나야 했습니다.
나폴레옹 황제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에게 길을 내주면 포르투갈을 점령해 영토를 분할해주겠다고 회유합니다.
한편 영약한 왕세자였던 페르난도 7세는 아버지인 까를로스 4세를 몰아내고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집요하게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까
를로스 4세는 어차피 민심이반과 무능력한 왕에 대한 민초들의 봉기로 자신이 왕권을 유지되지는 못할 망정, 불경한 아들이 차지하고
있는 모습은 볼 수가 없었기에 나폴레옹의 회유에 대해 아들을 왕위에서 끌어내려 달라는 부탁을 덧붙여 합의를 보게 됩니다.
스페인 국왕은 아들인 페르난도 7세 왕세자에게 왕권을 양위했지만, 합의한 바와같이 스페인 왕위는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 나폴레옹에게 넘어갑니다.
게다가 부도덕했던 왕비는 국왕이 프랑스로 이송되자 애인이었던 27세의 재상 고도이에게 정치권을 부여했는데 그는 왕비의 비호 하에 폭정을 해 민중들의 원성이 극에 달했습니다.
그때문에 스페인 민중들은 스페인 민중의 해방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스페인에 들어온 프랑스 근위군을 구원군으로 여겨 크게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처남이었던 Joachim Murat조아생 뮈라 원수는 까를로스 4세의 어린 아들 프란시스꼬 데 빠울라 왕자와 마리아 이사벨 공주까지 추가로 바욘으로 이송하려 했습니다.
더
불어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 나폴레옹을 스페인 왕으로 즉위시킨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이러한 프랑스의 약속 불이행과 압제는 친프랑스
세력 내에 내부분열을 일으켰고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차후 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된 결정적 단초가 되었습니다.
5월 2일 왕세자를 이송하던 날, 시민들은 프랑스 근위군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근위군의 척탄병 대대와 포병은 운집한 군중들에게 포격을 가했고, 마드리드 전역에 미친 이 소식에 시민들은 광역적인 봉기를 일으킵니다.
뮈라 원수에 의해 계엄령이 선포된 후 2만의 프랑스 기마군이 도시의 행정기관을 완전히 장악하고 도시의 지배권을 탈환하는 과정에서 격전이 벌어졌고 이 결과 많은 수의 시민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고야는 6년이 지나 1808년 5월 2일의 시가전을 떠올려 '1808년 5월 2일' 혹은 '맘루크의 돌격'이라고 불리는 그림을 완성합니다.
1808년 5월 2일.
그림에서 투르크인으로 구성된 맘루크 기병대가 시민과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맘루크는 '소유된 자'라는 뜻의 아랍어 단어입니다.
프랑스는 스페인에 민중 해방이라는 거짓 명분을 내세워 침략을 했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맘루크에 입성하여 이후에 맘루크를 노예병으로 활용했습니다.
맘루크 왕조는 스페인 사건에 한참 앞서 오스만 제국에 병합당했지만 오스만 치하에서도 18세기 말까지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면서 아라비아 반도의 군벌로 잔재했습니다.
프랑스 근위군이 시민 봉기를 진압한 뒤, 뮈라 원수는 당일 저녁 Grouchy그루시 장군을 필두로 하는 군사위원회를 창설하고 이를 통해 무기를 가진 자는 즉결처형할 수 있는 법률을 통과시켰습니다.
작은 칼이라도 소지하고 있으면 체포되었고 그렇게 붙잡힌 마드리드 시민 수천명은 다음날인 5월 3일 새벽에 몽끌로아 궁전 맞은 편 쁘린시뻬 삐오 언덕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고야는 당시의 양민학살을 '1808년 5월 3일'이라는 제목으로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1808년 5월3일.
배경의 건물은
Real Convento de la Encarnación엔까르나씨온 수도원, Real Monasterio de San
Lorenzo de El Escorial에스꼬리알 수도원, Catedral de la Almudena알무데나 대성당 중 하나를
고야가 기억에 의지하여 그린 것으로 보고 있으나 기실 정확히 어디에 있는 무슨 건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대체로 종교를 형상화한 교회나 수도원 정도로 해석합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색조 가운데 하얀 옷을 입은 남자만이 조명을 받은채 양팔을 벌리고 있습니다.
이 남자의 오른손 손바닥에는 성흔이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 남자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시켜 해석합니다.
배경에 멀리 보이는 성당 건물은 일종의 희망을 상징하기도, 이런 비참한 모습 앞에서도 침묵하는 종교에 대한 비판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나약한 시민들에 대비되는 기계적이고 어두운 색조의 군인들의 모습은 자유에 대한 열망과 이를 저지하는 비정한 힘의 대비로 나타납니다.
스페인 근대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을 주제로 삼은 이 두 작품은 오늘날 스페인의 자긍심을 확인시켜주는 징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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