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들'
당시 왕궁 화가였던 벨라스케스는 1656년 바로크 기조로 이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가로 3단, 세로 7단의 구도로 나눠 관찰자가 그림을 관찰하는 동안 안정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당대 국왕인 펠리페 4세와 그의 장녀인 마르가리따 공주, 그리고 합스부르크 출신의 왕비 마리아나도 등장하여 '가족도' 혹은 '펠리페 4세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에서 궁정의 시녀 개념인 무수리와는 달리 서양 왕궁의 시녀는 모두 귀족 가문 출신입니다.
마땅히 옮길 한글 단어가 없어서 '시녀들'이라는 제목을 쓰게 된 것 같습니다.
왼쪽부터 화가인 벨라스케스 자신, 무릎 꿇고 있는 사촌, 마르가리따 공주, 또 다른 시녀, 전경의 두 난쟁이, 그 뒤로는 시녀장과 왕비의 수행원이며, 뒤쪽 문에는 왕비의 시종이 서 있습니다.
그
림의 상황에 대해 다양한 설명이 제시되고 있는데, 거울 속에는 왕과 왕비의 모습이 있고 벨라스케스가 그들의 모습을 캔버스에 그리고
있는데, 왕과 왕비의 위치에서 가늠할 수 있듯이 이 그림은 그들의 눈에 담기는 광경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의견이 학계의 정설 중
하나입니다.
또한 벨라스케스는 예술적 열망뿐 아니라 고귀한 신분에 대한 열망도 이 그림에 자신을 등장시킴으로써 함께 투영시키고 있습니다.
난쟁이에 관한 재미있는 얘기로는, 한 왕족이 여러가지 이유로 다른 나라의 왕실로 이주할 때 일종의 선물 개념으로 난쟁이를 딸려보냈는데 이 난쟁이가 첩자 역할을 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벨라스케스는 이 그림을 그린 3년 뒤 산티아고 기사단의 휘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산티아고 기사단은 12세기부터 천주교의 성지로 알려진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에 방문하는 순례객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고 수세기가 지나 그 규모와 사회적 명망이 커지자 사회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발휘한 기사단입니다.
기사단의 자격을 부여받은지 1년이 지나 벨라스케스는 사망하였는데, 본디 그림에서는 벨라스케스의 가슴에 붉은 색 십자 휘장이 없었으나 그의 사후, 국왕 펠리페 4세는 다른 화가를 시켜 휘장을 덧입히도록 지시했습니다.
국왕은 벨라스케스를 지나치게 아껴 벨라스케스의 죽음에 크게 애도했고, 일각에는 동성애 관계에 있었을 것이라는 가설도 존재합니다.
아래는 빌바오의 구겐하임에서 봤던 그림인데 재밌었던 기억이 나서 함께 올려봅니다.
파블로 피카소의 '시녀들' 모작, 1957년작
소피 마티스(야수파 화가인 앙리 마티스의 증손녀)의 '시녀들', 2001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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