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막간의 유딧 소개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유딧;유디트는 실존했던 인물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아시리아의 한 장수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해낸 일종의 구국영웅으로써 천주교와 유대교에서는 유딧기라는 장을 빌어 정경으로 채택하고 있는 반면 개신교에서는 외경으로 간주하여 구약성경에서 제외되었다.
다만 유대교에서도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외경, 히브리어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에서는 정경이다.
(홀로페르네스 장군의 연회에 참석한 유딧. 1634년 작. 프라도 미술관 소장. 프라도가 소장하는 유일한 렘브란트의 그림이다. 렘브란트 시대의 이상적 여성상처럼 적당한 살집이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죽은 남편을 태운 재를 마시는 아르테미스 여왕으로 추정해왔지만 2009년에 프라도 미술관 연구소에 의해 유딧으로 확정되었다. 그림 속 주인공이 유딧이라고 판단할 간접적 근거(담비 모피의 진주와 금사 장식, 젊은 시종이 들고있는 황제앵무조개 잔 등으로 주인공의 지위를 나타낸다)와 장치(배경상 시종 아르바가 원래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담을 곡식 자루를 들고 있었으나 복원 중 덧칠로 인해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가 등장하지만 최근에는 그림 속 주인공이 임신한 상태라는 점을 들어 렘브란트의 아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성경상의 유딧은 이스라엘의 구릉산지가 넓게 펼쳐지는 베툴리아 출신의 귀족으로 남편인 므나쎄를 일찍 여읜 미망인으로 설정되어있으며, 베툴리아는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길목의 요충지로 설정되어 있다.
다만 성경을 제외한 어떤 역사서에도 베툴리아라는 지역과 유딧이라는 인물에 대해 언급되는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
따라서 루터가 종교개혁을 펼 당시 유딧기를 외경으로 간주하여 구약성경에서 제외한 것은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요즘은 대체로 유딧을 유대인으로, 베툴리아를 여호와의 집을 상징하는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게 중론으로 모아지고 있다.
유딧기가 히브리어, 그리스어, 시리아어, 불가타라틴어판으로 여전히 보존되어 있다는 데에서 대중의 인기를 구가했던, 그리고 기록의 전반에 걸쳐서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묵시적 내용을 함축하면서 연속적 긴장을 보여준다는 데에서 소설적 재미를 충분히 갖춘 허구의 문학작품이라고 추정할 수 있겠다.
2. 아시리아라는 나라가 있었다
기원전 25세기, 아시리아라는 제국(성경에서는 앗수르)이 세워졌다.
세계 최초의 다민족 집합국가였고,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집트를 거쳐 시리아까지 정복한 역사상 최초로 오리엔트 통합을 실현 직전까지 끌고갔던 국가다.
바빌로니아족, 히타이트족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다 이집트 기준으로 기원전 13세기 람세스 13세 재위기에 시작된 민족대이동으로 아시리아는 크게 위축된다.
그 민족대이동을 정벌로써 시작되게끔 촉발한 민족은 바로 바다민족으로, 아카이아인;에크웨시족, 티레니아인;테레시족, 아나톨리아인;루카족, 사르디니아인;셰르덴족, 시켈인;세켈레시족, 필리스티아인(블레셋);펠레세트족, 트로이인;티에케르족으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이들과 만난 민족은 아시리아와 이집트를 빼고 모조리 멸망했고, 아시리아의 동맹이었던 히타이트도 자취를 감춘다.
바다민족은 청동기를 끝내고 철기의 물꼬를 텄던 민족이지만 스파르타가 위치한 펠로폰네소스에서는 주민의 90프로가 몰살당하고 도시간 국가간 무역도 원천봉쇄가 등 주요도시들이 모두 파괴되어 소아시아 지역의 문명 수준은 수백 년 후퇴한다.
나중에 바다민족의 지역은 이후 등장한 페르시아에 의해 식민지화된다.
어쨌건 이 때를 틈탄 아시리아는 말의 품종을 개량하고 아시리아가 맞선 스키타이족보다 몇 단계 더 발전한 형태의, 중세적 개념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기병을 운용한다. (아시리아 이전에는 말의 등이 아닌 엉덩이에 탑승)
다만 아시리아의 회화에는 마부가 자신의 말과 기병의 말의 고삐를 동시에 쥐고 있는 모습 등 과도기적인 예가 나타난다.
또한 지원부대의 개념을 확립한 병참을 동원하여 새로운 방식의 전투를 도입했다.
그러나 피지배민에 대한 지나치게 잔인하고 강압적인 정책과 가혹한 과세정책 등으로 반란은 끊이질 않았고, 원래 동맹이었던 바빌로니아는 스키타이족, 메디아인, 킴메르인과 함께 연합군을 일으켜 기원전 612년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채 아시리아를 멸망시켰다.
당시 살아남은 아시리아인은 메소포타미아 중에도 최후의 아카드계 민족으로 멸망 이후 페르시아에게 복속되었고 이윽고 아르메니아 제국의 속국이 되었다가 로마제국에 편입된다.
로마 지배기에는 안티오키아를 근거지로 동방의 학문과 예술을 융성시켰다.
몽골의 침략에 의한 학살,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 대학살 등으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현재의 시리아에 40만명, 이라크 북부에 30만명, 그 외에도 터키 동남부, 이란 북서부, 요르단, 레바논 등 중동에 주로 분포하여 맥을 잇고 있다.
그리고 현재 중동 외 유럽의 스웨덴, 독일에 거주하는 아시리아인의 총계는 최소 20만명, 미국에서는 적어도 50만명 이상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나 터키보다 최소 70배 이상 많은 수치를 보여준다.
3. 다시 유딧의 이야기
유딧의 시대는 기원전 6세기의 시점.
아시리아에는 느부갓네살 왕(세계 7대 불가사의인 바빌론의 공중정원를 만든 그 왕이 맞다!)이 총애하던 홀로페르네스라는 총사령관이 있었다.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자 하는 느부갓네살 왕의 뜻에 따라 홀로페르네스는 육군보병 12만명과 궁병 1만2천명을 이끌고 대량의 국고 지원을 등에 업고 원정에 나서 바빌론 인근 평야 전체와 부족들을 정복하고 지중해 동안이 이르러 베툴리아를 포위한다.
지역을 점령할 때마다 홀로페르네스의 군사는 포도주를 마시며 자축하였으나 홀로페르네스는 야전에서 결코 술을 먹지 않을만큼 투철한 사명감을 지니고 있었고 신중히 작전을 세워나갔다.
이스라엘에 다다른 홀로페르네스는 이스라엘의 특이한 지형과 결사항전에 애를 먹으며 원정길 최대의 고비를 겪고 있었다.
전면전 벌인다면 결국 홀로페르네스가 승리를 거두더라도 아군측의 막대한 손실이 예상되었다.
다양한 전투를 치러온 명잡답게 약간의 시간을 두고 주변부족들로부터 이스라엘 진영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고, 최상의 결론에 따라 주요 수원지를 차단한다.
식수가 고갈된 이스라엘 진영은 갈 수록 지쳐갔고 시간만이 아시리아에 승리를 가져다 줄 터였다.
유딧은 남편 므나쎄가 죽은 후 세상과 절연한 채 정숙한 모습으로 하느님에게만 믿음을 두는 경건한 여인으로 성경에 먼저 등장한다.
홀로페르네스의 침공 소식을 접한 유딧은 정절을 버리고 살인까지 저질러 나라를 위해 의절하겠다고 하느님께 부르짖으며 자신의 뜻을 전한다.
홀로페르네스의 눈을 홀리기 위해 물로 몸을 씻어내고 값비싼 향유를 바른 후 머리를 정돈하여 머리띠를 쓰고 화려한 옷을 차려입는다.
포위된 베툴리아의 성을 시종 아브라와 함께 벗어난 유딧은 적진에들어가 홀로페르네스에게 투항 의사를 밝힌다.
유딧은 홀로페르네스에게, 식수가 끊긴 이스라엘 진영은 죽을 위기에 처했고 열악한 상황에 타락한 사람들은 신이 금한 일들을 벌이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신이 그들을 버리기로 작정했으니 바로 이때 이스라엘을 치면 이스라엘은 함락되고 이스라엘의 신이 아시리아의 편에 설 것이라고 고한다.
유딧의 그럴싸한 말에도, 아름다운 자태에도 이끌린 홀로페르네스는 오랜 시간 유딧과 함께 얘기를 나누고 의심을 거둔 채 야전에서 군사들이 벌인 연회에 유딧도 초대하여 항상 자제해온 포도주를 잔뜩 마신다.
연회에서 총사령관 막사로 돌아온 홀로페르네스는 유딧과 한 침대에서 동침한 후 골아떨어진다.
유딧은 긴 칼을 집어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두 번 내리쳐 머리를 잘라내고야 만다.
숭리가 확정된 함락전을 앞둔 아시리아의 군대는 술과 분위기에 취해있었다.
야전지가 한껏 고취된 틈을 타 유딧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곡식 자루에 담아 시종 아브라에게 건내고 이스라엘 진영으로 달아났다.
다음날 아침 성벽에 걸린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본 아시리아의 군대는 혼란에 빠져 결국 퇴각한다.
홀로페르네스는 신에 대한 자신의 기도대로 나라를 구한 것이다.
4. 팜므 파탈 혹은 아니마로써의 여성성
많은 회화 작품에서는 대표적으로 구약성경의 인물인 유딧과, 신약성경의 인물인 살로메를 자주 다루고 있다.
여담으로 회화 속 인물이 누군지에 대해 추정 가능한 장치는 여러 개가 있으나 단순하게는 칼을 들고 있다면 대체로 유딧, 칼이 없으면 살로메라고 판단하면 된다.
프라도 소장본 렘브란트의 유딧은 정결한 여인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반대로 클림트는 자신이 그린 2개의 유딧을 통해 프리드리히 헤벨의 희곡 유딧의 캐릭터를 그대로 투영시킨다.
1840년 초연을 가진 이 무대의 유딧은 이때를 기점으로 팜므 파탈의 이미지를 지니게 된다.
(아우구스트 리델의 유딧. 루트비히 1세가 1841년 구입했다가 현재는 독일 뮌헨의 노이에 피나코테크 소장. 프리드리히 헤벨의 희곡이 발표된 것과 같은 해에 완성. 초상화 구도인 이유는 화가가 실제 초상화 전문이었기 때문.)
이는 원점으로 회귀한 신고전주의에 반발했던 낭만주의가 등장한 인과와 맥을 같이 한다고도 볼 수 있다.
동시에 종교적 해석을 벗어나 자유 해석에 능했던 전개 능력과 배경 중심이 아닌 인물 중심의 묘사 방식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클림트의 작품에는 목을 자르는 극단적 행위나 잘린 목에서 흐르는 피 등 유딧으로 추정할만한 장치는 등장하지 않는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딧 1. 1901년 작. 오스트리아 비엔나 벨베데레 소재 오스트리아 갤러리 소장.)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딧 2. 1909년 작. 이탈리아 베네치아 소재 국제현대미술관 소장. 유딧이 아닌 살로메로 언급되는 경우도 있다.)
클림트와는 달리 젠틸레스키는 유딧을 통해 여성의 성적인 매력이나 매력을 이용한 숙명적 마성은 철저히 배제시킨 채로 남성에 대한 증오를 보여준다.
젠틸레스키는 자신의 후원자이자 친구였고 동시에 자신과 같은 화가 타시로부터 원근법을 배우던 중 타시에게 상습적인 강간을 당했다.
타시의 처벌을 원하며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당시의 법의 허점을 이용한 타시는 젠틸레스키와 결혼을 하겠다고 하여 처벌을 면한다.
오히려 젠틸레스키는 피해자임에도 부도덕한 여성으로써 낙인 찍히다시피 하였으나 그런 역경을 극복하면서 바로크 시대 여성들이 뛰어들 수 없던 회화시장에서 까라바죠의 명암법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23세라는 젊은 나이에 피렌체의 디세뇨 아까데미아의 회원이 될 정도로 주목 받았다.
젠틸레스키는 클림트와는 달리 완벽한 형태에 가까운 아니마를 유딧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보여준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유딧. 1640년 이전에 완성으로 추정. 이탈리아 피렌체 소재의 우피찌 미술관 소장. 특히 유딧의 모습은 화가인 젠틸레스키의 외모와 같다. 강간으로 받은 정신적 고통의 간접적인 복수라고도 평가된다.)
5. 유딧을 다룬 여러 회화들
(크리스토파노 알로리의 유딧. 1613년 작. 영국왕실컬렉션. 특이하게도 잘린 머리는 화가의 모습과 같다.)
(트로핌 비고의 유딧. 1640년 작. 촛불의 대가로 유명한 비고의 유딧이다. 미국 볼티모어 소재 월터스 미술관 소장.)
(프란스시코 고야의 유딧. 1819년에서 1823년 사이 고야가 자신의 집이었던 낀따 델 소르도에 말년에 그린 검은 그림들 연작 중 하나다. 낀따 델 소르도는 귀머거리의 집이라는 뜻인데 고야가 귀가 멀어서 그 이름을 붙였다기보다 원래 집주인이 귀머거리였기 때문이다. 1874년부터 프라도 미술관의 큐레이터였던 살바도르 마르띠네스 꾸벨스에 의해 2년간 캔버스로 옮겨지면서 많이 손상되었다.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국립미술관 소장.)
'왕너구리의 메세타 고원에 불 붙이기 > 미술관조깅 (예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의 '마망' (0) | 2018.09.09 |
---|---|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 (1) | 2018.09.05 |
스페인 내전과 게르니카, 그리고 피카소 (1) | 2017.01.18 |
고야의 '1808년 5월 3일' (0) | 2017.01.18 |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0) | 2017.01.18 |
프라도의 모나리자 (1) | 2017.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