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에 친구 녀석 하나가 초경량 항공기인 ds5lzo를 타고 이곳저곳을 여행하곤 했는데 그 녀석은 재산이 820만 프랑을 헤아리는 복부인의 외동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녀석의 이름은 독일식의 카를 슈피엘이었지만 로망슈어를 주로 썼었죠.
하여간 그 비행기는 바젤란트의 리슈탈에서 거액의 현금과 갖가지 문서를 싣고 출발하여 베른의 브리엔츠 부근에 도착했는데, 녀석이 비르에 위치한 녀석의 친구네 서점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와 보니 비행기가 없더라는 겁니다.
마땅한 방도가 없어 큰 돈을 융통하고자 뇌샤텔로 향한 친구는 라쇼드퐁의 베르누이에 위치한 시계제작소로 향했다고 합니다.
몇 차례 고가의 시계를 구입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산허리 위로 하얗게 에델바이스가 만발해 있었습니다.
때마침 es war ein edelweiß(그것은 에델바이스 한 송이였다)라는 문장이 인쇄된 엽서들이 상점과 기념품점에 진열되기 시작했고, 루마니아 출신의 마약상 몇몇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마약을 팔아넘겼는데 지역구의 아이들은 이미 그 약에 중독된 상태였다고 합니다.
마약이 유통되기 한 해 전만 해도 목초지나 포도밭 근처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은 부모의 눈을 피해 경사진 산등성이로 놀이터를 옮겼습니다.
제조공식이 알려지지 않은 이 마약은, 영세중립국 시절 발로르브 요새에서 대량으로 발견된 이후 저급한 마약으로 취급되어 헐값에 아이들의 수중에까지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상당히 독특한 환각효과를 지닌 이 약은, 아이들이 풀밭에 퍼질러 앉아 마치 요즘 영화에 흔한 소재로 쓰이는 좀비와도 같이, 살아 움직이는 그 무언가의 살을 뜯어 먹게 만드는 괴이한 작용기전을 수반했습니다.
또한, 부수작용으로 통각과민증을 유발했기에, 아이들은 약효가 떨어져 동통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마약에 즉각적인 의존성을 보였고, 급기야 서로의 팔뚝이나 장딴지 살을 나눠 먹고 감염이나 출혈 등으로 숨지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고 합니다.
불행하게도 제 친구 녀석은 그 광경을 수차례 목도하고 큰 충격을 받았지만, 호기심에 자신도 그 약을 먹어버리고 아이들의 살을 먹었고, 이후에는 사람 고기에 완전히 중독된 상태가 되었습니다.
제가 살았던 생피에르에미클롱에 놀러 왔을 때에도 그 맛을 도저히 잊지 못하고 작크 아나똘레 프랑수아 티보씨네 일곱 살짜리 아들과 실베스트르 보나르 프랑수아 티보라는 명찰을 달고 있던 열한 살짜리 사내아이를 잡아다가 요리를 해 먹었을 정도니까 말이죠.
덕분에 저도 이제는 사람 고기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되었답니다.
녀석은 아이들을 잡아다가 일단 옷을 모두 벗기고 골방 기둥에 묶어놓은 다음 옷은 모두 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고 몇 날 며칠 동안이나 아이들을 때리면서 고통을 줬습니다.
그래야만 살이 야들야들하고 말랑말랑해져 고기 맛이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녀석은 열한 살 먹은 사내아이를 먼저 죽였습니다.
녀석과 저는 특히 대퇴부의 화살신경 부위를 가장 좋아하는데, 그 사내아이는 다리에 살이 아주 기가 막히게 올랐기 때문이었죠.
녀석과 저는 소년의 머리와 뼈, 그리고 내장을 제외한 모든 살코기는 한 점도 남기지 않고 모두 요리해 먹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부분에 관해서는, 주로 엉덩이 살을 가스 오븐에 넣어 굽거나, 회음부를 살짝 데쳐 숙회나 수육을 만들어두고, 등허리 부분을 쯔유에 졸이고, 종아리는 루꼴라와 비트를 넣고 두어 차례 플람베 하여 질척한 찌개로도 보관하고, 점액질이 많은 부분은 퓌레나 담백한 푸딩으로 만드는 등, 온갖 종류의 요리를 다 해 먹었습니다.
물론 일곱 살 먹은 사내아이도 비슷한 방법으로 요리해 먹었습니다.
빠리는 수많은 사람이 북적대는 대도시라 사람 고기를 먹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기에 수년 동안 사람 고기를 맛보지 못하다 결국 한 번 먹어봐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까르띠에라땡 9번가에 있는 생미셸 출판사 건물의 2층에 살고 있었는데, 기거한지 반 년쯤 지나자 인근의 쁠라스 몽쥬 역이 궤조 공사를 시작하게 되어 낮에는 꽤 어수선했습니다.
그 때문에 빌쥐프 쪽에서 출근이나 통학을 하던 삐에르 마리 퀴리 대학교의 학생들과 교직원들은 다소간 불편을 겪었을 겁니다.
저는 육 주간에 걸쳐 길에 오가는 많은 사람들을 관찰하고 시간대마다 대략의 동선을 파악했습니다.
부인은 주중에는 오전 여덟 시에서 여덟 시 이십 분 사이에 빠리식물원 서문 쪽 자연사박물관과 가까운 버스 정류장에서 딸과 함께 내려 딸을 에꼴 생뜨 쥬니비브 유아원에 데려다 준 다음 광물학 연구소로 출근하더군요.
부인과 친해지고자 한 데에는 부인의 성적인 매력에 이끌리기도 한 것도 사실이지만, 부인의 딸을 요리하고자 하는 목적이 가장 컸습니다.
그래서 1998년 8월 7일, 금요일에 부인을 저의 집에 초대한 것입니다.
제가 밀라네즈와 라비올리를 요리하는 동안 부인은 댁의 딸을 데리고 오셨고 지체 없이 댁의 딸을 먹어야겠다고 결심을 굳혔습니다.
부인에게 드렸던 샤또 페트리우스에는 미리 강력한 신경억제제인 레보메프로마진을 섞어 두었었습니다.
부인에게 일어나라고 보채는 아이의 뒤통수를 술병으로 가격하자 단번에 쓰러지더군요.
저는 아이를 주방으로 가져가 열두 조각으로 나누고 적당한 아이스박스에 차곡차곡 채워 넣은 후, 제 옷가지와 몇몇 집기, 그리고 그 아이스박스만을 챙겨 바이에른의 뮌헨으로 왔습니다.
자세한 위치는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일단 뮌헨의 자그마한 펜션에 도착한 저는 닷새간 쉬지 않고 댁의 딸을 먹었고, 고기를 먹는 동안에 뼈는 물에 푹 고아서 사골국물을 내어 마셨고, 그리 맛이 뛰어나지 않은 뇌와 허파까지도 잘 익혀 먹었으니 신체의 어느 한 부분도 낭비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상적인 성적 기호를 지닌 사람이라 댁의 딸을 추행하지는 않았으니 안타깝게도 처녀로 죽은 셈이군요.
사람 고기에 대한 저의 간단한 결론은, 사람이건 짐승이건 암컷의 고기가 더 연하고 맛이 있다는 겁니다.
물론 가임 능력을 갖추지 않은 암컷인 경우, 그 고기의 맛은 단연 일품입니다.
그런데, 비슷한 조건의 고기임에도 어떠한 유전적 요인에 의해 육질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특이한 경우도 있다고 여겨집니다.
아마 댁의 딸이 그런 경우가 아닐까 생각이 드는군요.
미처 먹지 못한 머리카락의 일부는 보시다시피 이 편지의 봉투 속에 넣어두었습니다.
참, 트라우마를 극복한 부인께서 교외 출신의 평범한 남자와 재혼하여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부인이 다시 자식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다시 한 번 찾아뵙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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