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요약
1. 원래는 NON PLUS ULTRA였다. 이이상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었지만
2. 까를로스 5세 황제가 한계의 수식어인 NON을 빼고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는다.
3. PLUS ULTRA는 지금에 와서, 더 큰 것이 있다, 더 많은 것이 있다는 뜻.
1. 스페인의 국장
스페인의 대내 명칭은 에스파냐;에스빠냐España다.
한국도 그렇듯 대외적으로는 코리아라고 불리며 대내적으로는 간단히 한국, 정식명칭은 대한민국이라고 불리고 있다.
스페인의 정식 명칭은 레이노 데 에스빠냐Reino de España, 레이노는 왕국이란 뜻으로 스페인의 정식명칭은 한국식으로 스페인 왕국이라고 불린다.
현대 스페인에는 프랑스 출신의 부르봉 왕조의 맥을 잇는 왕족과 왕이 존재한다.
헌법상 입헌군주제 국가로 명시가 되어있으며, 왕이 국가 전반에 걸쳐 군림을 하진 않지만 통치권을 몇 가지 가지고 있어 헌법상 오류를 지닌다.
따라서 완벽한 입헌군주제 국가가 아닌 입헌군주제를 지향하
는 국가로 보는 게 더 적합하다고 볼 수 있겠다.
스페인의 국기는 1492년 까딸루냐 지방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통일시킨 후 통일왕국으로 시작하여 제국, 공화국, 군정국, 민주국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십 번 바뀌어왔다.
하지만 국장만큼은 약간의 형태 변화를 제외하고 거의 같은 형태를 유지해왔다.
아빌라를 관광할 기회가 된다면 무료로 운영 중인 군사박물관에서 그 변천사를 볼 수 있다.
2. 스페인의 공식국장(표장)
국장의 정상단에는 스페인 왕관, 양쪽에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이 위치하며, 왼쪽 기둥 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관, 오른쪽 기둥 위에는 국장 정상단에 있는 것과 같은 스페인 왕관이 놓여있다.
기둥을 이으며 걸쳐진 휘장에는 국가강령(=국가신조)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직과 스페인의 국왕직을 겸직했던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까를로스 1세와 까를로스 5세라는 칭호를 같이 갖고 있었던 황제의 좌우명이기도 했던 PLUS ULTRA가 적혀져 있다.
여담으로 이 까를로스라는 이름은 스페인식 이름으로, 이탈리아에서는 까를로, 네덜란드에서는 카렐, 독일어권에서는 카를, 라틴어로는 까롤루스, 프랑스에서는 샤를, 영어권에서는 찰스로 불린다.
보통 한국에서는 독일어식인 카를이라고 흔히 부르고 있다.
3. 지구 구형설, 혹은 구형론으로써의 시작
현재까지 알려진 모든 철학자를 통틀어 가장 오래된 철학자이자 7현인 중 하나였고 또한 밀레토스 학파의 창시자로 철학과 과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탈레스라는 철학자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격언인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기실 그 이전의 철학자였던 탈레스가 남긴 격언이다.
소아시아 서안의 이오니아 출신으로 이집트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익혔고 정치에도 능했던 탈레스는 기원전 585년에 있었던 개기일식을 미리 예측했고 기상학을 익힌 후에는 올리브 풍작을 미리 예측하고 압착기 최우선 대여권을 구입하여 감람유 농사로 대부호가 되기도 했다.
우주에 대한 끊임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던 탈레스는 어느 날 지중해를 항해하고 돌아온 후 지구는 가운데가 솟아오른 원반형의 형태이며 우주는 물로 구성되어 있고 지구는 그 물 위에 떠 있는 상태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이미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 널리 받아들여지던 견해였다.
초현실적이거나 초자연적 이유에서 원인을 찾은 게 아닌, 자연 현상에서 그 원인을 탐구했고 당시 기술과 관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합리적이고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목했던 것이다.
이는 탈레스의 의의와 맥을 같이 한다.
다만 당시의 견해는 현대 과학에서 아직 지구 구형이론에서는 모자랐지만 과학자들의 호기심을 강력히 자극하고 과학을 진일보시킨 일종의 획으로 작용한다.
그 직후 피타고라스 학파의 거장 피타고라스가 뒤를 잇는다.
수학에서는 탈레스만큼의 역량을 보였고 동시에 종교, 도덕, 정치에도 영향을 미친 철학자였다.
탈레스와 마찬가지로 이오니아 출신이었던 그는 이집트에서 유학을 하는 등 탈레스와 비슷한 행보를 보이다가 이탈리아로 떠난다.
이탈리아로 간 것은 이상향을 좇기보다는 폴뤼크라테스의 폭정에 못이긴 이유가 가장 크다.
보통 피타고라스는 수학의 거장으로 평가받기도 하는데 사실상 현대 수학에 굉장한 영향을 미친 거장은 피타고라스가 아닌 유클리드다.
직각삼각형의 빗변의 제곱이 직각을 둘러싼 변들의 제곱과 같다는 것을 피타고라스가 발견하고서 100마리의 황소를 제물로 바쳤다라고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 '발견했다'를 '증명했다'라고 보기는 어렵다.
수학의 증명이라는 개념은 피타고라스가 세상을 떠나고 100년이 더 지나서야 본격적으로 도입이 됐기 때문이고, '발견했다'를 '증명없이 최초로 알아냈다'라고 볼 수도 없다.
때문에 피타고라스를 수학 발전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어찌됐건 피타고라스는 지구는 완벽한 구형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직도 피타고라스의 주장은 충분하지 못하다.
지구는 완벽한 구형이 아닌 미세한 타원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주장에도 이유는 있다.
당시 종교와 과학은 분리되지 않았고 창조주의 완벽함과 그 섭리를 완벽하다는 표현으로 반영을 시켰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는 아리스토텔레스는 훨씬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했고, 에라스토테네스는 지구의 둘레를 계산해냈다(물론 당시에는 중력가속도의 오차 등은 구할 수 없는 기술력의 한계로 결과값의 오차는 있었다).
더구나 동양에서도, 그리스와 비교해 천문학이 결코 뒤쳐지지 않던 후한시대, 구형설과 비슷한 개념의 혼천설이 존재했다.
3. 중세 유럽에서의 지구 구형론 논란
중세 유럽에서 종교적 이유로 구형론이 거부당해왔다는 잘못된 얘기는 블로그에서, 책에서, 혹은 여행가이드들의 얘기를 통해 끊임 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하지만 중세 과학자들은 이미 구형론을 기정사실로 널리 받아들인 상태였고, 중세에는 천동설이 옳냐 지동설이 옳냐가 논쟁의 중심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초기 교부들도 지구 구형론을 동의해왔고, 헬레니즘 시대에 이미 완성되어 중세까지 이어져온 천동설은 지구 구형설을 기본 전제로 성립된 것이다.
이 지구 구형설은 대항해시대에 포르투갈에서 출항한 마갈량;마젤란이 세계일주를 완주하여 구형설을 증명하고 과학계에서 모든 논란의 종지부를 찍는다.
4. 하지만 논란은 끝나지 않는다
논란의 종지부를 찍었다는 것은 주류사회와 학계에 한정된 일이었다.
대중은 지구가 둥글건 말건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그 대중에서도 뭍을 떠나 바다로 나가던 항해사들이 있다.
미국 최초의 궤도 비행사인 존 글렌은 궤도에서 지구는 둥글다라고 외친 후 대량의 항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는 판국에 당시 그런 사람들은 상당했을 것이다.
본디 PLUS ULTRA는 NE PLUS ULTRA, NEC PLUS ULTRA, NON PLUS ULTRA의 형태였고 본디 더이상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뜻을 지닌다.
바다에서 나아가다 보면 낭떠러지가 있어서 떨어져 죽게 된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고대에는 이베리아 반도가 세상의 끝이라 여겨 해협 밖으로 더이상 누구도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있어왔다고 한다.
나는 나름의 연구와 고증되어 정리된 역사서를 접하면서 이 얘기에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기원전 10세기 경부터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는 왕래가 활발했고 무역과 교역도 이루어졌으며, 날씨가 그렇게 흐리지 않은 이상 스페인 남부 지브롤터 해협이나 알보란 해협 연안에서는 모로코 땅이 쉽게 관측된다.
다만 스페인 국장에 관한 얘기를 잇기 위해, 낭떠러지 어쩌구 얘기를 바탕으로 이 대목을 채우는 것을 독자 제위분들이 양해해주시기를 바란다.
스페인의 황금기를 이끈 까를로스 5세 황제는 스승이었던 루이기 마를리아노의 충고에 따라 NON PLUS ULTRA에서 부정과 한계의 수식어인 NON을 뺀 PLUS ULTRA를 평생에 걸친 좌우명으로 삼는다.
이는 크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선대 황제인 막시밀리아노 1세로부터 상속받은 영토와 직접 황제가 된 후 넓혀간 영토의 방대한 면적, 그리고 그 업적의 직접적 수식이가 될 수도 있고,
개척자이기도 했었던 항해사들의 사기를 고취하고, 실제 마젤란과 바스코 다 가마, 그리고 스페인에서 출항한 콜럼버스 시대는 물론 그 이후에 출항한 항해사들이 정말 바다로 나가보니 새로운 땅도 보고, 종전까지 기록이 없던 새로운 바다도 발견하고, 더 나가보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는 일종의 각성이 PLUS ULTRA로 남게 되었던 것이 될 수도 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이 두 단어의 강렬한 문장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문장이 되었고 현재 스페인 국기의 국장으로도 쓰인다.
이 문장의 의미는 지금에 와서 “나가보니 더 큰 것이 있더라, 더 많은 것이 있더라”라는 의미로 널리 쓰인다.
5. 부록: 플루스 울트라의 표기
PLUS ULTRA의 표기에 대해 여러 자료들에서 다양한 표기법을 나타내고 있다.
PLUS ULTRA
PLVS VLTRA
PLVS VLTRE;쁠루스 울뜨리, 쁠루스 울뜨레
PLVS OVLTRE
단순히 접근하자면 규범 라틴어냐, 교회 라틴어냐, 링구아 프랑카냐, 불가타 라틴어냐에서 표기의 차이가 발생할 것이고,
발음의 차이에서는 고전이나 상고 라틴어를 따르느냐, 교회 라틴어를 따르느냐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다만 마지막에 적어둔 PLVS OVLTRE는 프랑스어 표기에서 U를 V로 대체하는 고전라틴어 표기법을 적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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