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2일.
스페인에게는 역사상 3번째 황금기를 열었던 콜럼버스가 쿠바에 1492년 10월 12일 첫 발을 디뎠던 날이다.
유럽사에, 크게는 세계사에 큰 획을 그었던 때이기에 현재는 스페인의 주요한 국경일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기록상 세계최초로 미대륙으로 진출한 것은 스페인보다 훨씬 앞선 고대 이집트인들이었고, 거의 기정사실화 되었거나 확실한 것으로 중론이 모아지는 경우만 해도 바스크인과 바이킹이 콜럼버스보다 앞선다.
그렇다면 콜럼버스는 누구인가?
이탈리아, 정확히는 제노바 공국 출신으로 ‘추정’만 할 뿐이다.
이탈리아식으로는 끄리스또포로 꼴롬보,
스페인식으로는 끄리스또발 꼴론,
우리는 영어식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는 관용에 가까운 표기를 따른다.
(콜럼버스는 이즈음에 동방견문록에 심취하여 형과 지도 제작에 열중하고 있었다)
각설하고 콜롬버스는 왜 중남미로 갔을아?
이미 기원전의 시점에 과학자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입증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여전히 지구는 평평해서 계속 나아가다보면 낭떠러지가 있어 떨어져 죽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콜롬버스는 여느 사람과는 생각이 달랐다.
주구장창 나아가다보면 지구도 한 바퀴 돌 수 있고 언젠가는 중국과 인도에도 당도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당시 유럽은 오스만을 거치지 않고 지중해를 통해 인도로 가는 방법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후추가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라르 드빠르디유 주연의 1492 콜럼버스. 영화의 내용은 콜럼버스의 실화와는 많이 다르다 많이!)
이탈리아에서, 포르투갈에서, 영국에서 먼저 인도로 가는 해로를 발견하기 위한 후원을 왕족들과 귀족들에게 요청하지만 번번히 퇴짜 맞고, 한 상인 형제의 도움과 중재로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을 만나고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 받았다.
콜롬버스가 갖춘 항법과 항로지도는 굉장한 수치로 오차가 컸기에 인도는 빗겨가지도 못하고 아예 엉뚱한 중남미에 당도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스페인에게는 커다란 기회로 작용하여 피크 때는 전세계 금의 85프로를 독점하기도 했고, 포르투갈과의 또르데시야스 혹은 또르데질랴스 조약을 통해 세계 지도를 다시 그리며 양분화하여 두 나라가 나눠갖는 과정까지 주도하기도 했다.
어쨌건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그 땅을 인도라고 믿었고, 그래서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을 인도 사람이라는 뜻의 인디언이라고 부른다.
(까스띠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을 전제주의 조건으로 통치하던 이사벨 여왕)
한편, 중남미 사람들에게 콜롬버스는 잔혹한 악의 화신 그 자체였고, 사실상 콜럼버스는 중남미에서 죄를 많이 지었다.
유럽의 관점에서 여태 그렇게 여겨져왔듯 위인일지는 몰라도, 침략을 받은 아메리카 입장에서는 재앙의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어찌되었건 스페인에서는 10월 12일에는 재재소소에서 크고 작은 축제가 밤 늦도록 끊이질 않는다.
(스페인 현 국기에 쓰이는 국장과 휘장.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당시 항로개척자들과 유럽의 표어였던 non plus ultra(더 많은 것은 없다; 이 이상은 아무 것도 없다) 마저도 바꿔버린다)
누군가에게 역사는 조금 고루한 학문일 수도 있다.
그래도 당시 유럽사는 무조건 재미있으므로 어느 정도 익혀두면 당신의 아이에게 들려줄 재미난 이야기 보따리를 꽤 무겁게 준비해둘 수 있을지도 모른다.
2부는 스페인의 제 3의 황금기 전반을 다뤄보고자 한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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