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학교에 가기 전까지 6년에 걸쳐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두통에 시달렸다.
희한하게도 두통은 거의 정확히 오전 9시에 시작해서 9시간 동안 이어지다가 오후 6시에 끝났다.
두통은 때에 따라 어찌할 바를 모르겠을 정도로 심해서 그 나이에 배운 어설픈 욕설들을 큰소리로 외치기도 하고 내 스스로의 인생을 저주하기도 했다.
당시에 키우던 복이라는 개는 며칠간 가출을 했다.
어디 자동차 타이어에 비비적댄 건지 숯검댕이가 되어 돌아왔는데, 발정기가 되어 잠시 남자친구를 사귀다 돌아온 것이다.
복이는 나처럼 허약하여 여러 병을 지니고 있던 친구였던지라 복이가 나가있던 사이 며칠을 걱정했는지 모른다.
배가 부르더니 어느 주말 대낮에 출산을 시작했다.
힘을 주다가도 체력이 모자라 처음으로 나오던 새끼의 머리가 걸려버렸다.
출산의 과정이 얼마나 버거울지를 잠시 생각하다가 그 상황이 너무 가슴 졸이고 안타까워 새끼의 머리를 잡고 아주 조심스럽게 빼주었다.
복이는 연신 첫째를 핥으면서도 이따금씩 힘을 주며 나머지 세 마리를 더 낳았다.
첫째는 결국 죽고 말았다.
어미가 힘 조절을 하는 과정에 새끼의 몸이 몇 차례 눌려지는 걸 반복하면서 폐에 들어차있는 양수가 빠져야 숨을 쉴 수 있었던 것이다.
새끼가 살기 위해서는 어미와 새끼 모두 힘든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나는 죽은 첫째를 신문지에 말아 얇은 봉지에 담아서 그 다음날 소월길을 따라 언덕을 올라가 큰 돌덩이 옆에 묻어주고, 나중에 위치를 잊지 않고자 돌덩이에 은색 스프레이로 나름의 표시를 해두었다.
복이가 살아있을 때 당시로써는 아직 포장이 안되어있던 흙길 산책로를 나는 복이와 많이 쏘다녔었다.
지금은 그 길로 올라가면 하얏트의 제이제이 마호니 입구를 지나게 된다.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복이는 장염으로 한참을 고생하다가 결국 죽었다.
생전에 잘 씹던 개껌이랑 추운 날씨에 산책용으로 입히던 외투도 찾아서 첫째의 묫자리 옆에 같이 묻었다.
그리고 중학교에 입학함과 동시에 내 기나긴 두통도 끝났다.
아마 그즈음에 나무계단길도 만들어지고 작은 정자도 만들어진 것 같다.
가로등이 없어서 밤에 그 길을 걸으면 꽤 스산했다.
그래도 복이가 보고 싶을 때엔 다소 밝은 저녁에 복이가 좋아하던 길을 올라가기도 하고 그 길을 지나가다가 많이, 그리고 조용히 울기도 했다.
2학년이 되고 나는 첫사랑을 만났다.
소월길을 처음 같이 걷고 두 모녀의 작은 묘지를 지나면서 나는 그 아이에게 얘기했다.
눈병 걸린 채 버려져있던 어린 복이를 내가 줏어왔고, 복이는 그때 나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고, 내 인생의 첫 번째 동물친구였고, 목줄 차기를 싫어했으며, 병에 걸려 장이 녹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새끼들을 낳고 세상의 자신의 흔적을 그래도 남기고 떠났다는 얘기도 해주었다.
그리고 점점 더 그 길을 많이 걸을 수록 복이에 대한 추억은 사라져갔다.
그리고 첫사랑은 으레 그렇다고 하듯 나중엔 첫사랑이 그저 친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각자의 친구와, 각자의 연인을 가지면서 첫사랑에 대한 감정도 점차 사그라들었고, 복잡해져가는 인간관계에서 신경써야 할 것들이 많아지면서 복이에 대한 회상도 더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항상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선택을 하지만 결과는 때에 따라 안좋은 경우도 있다.
처음이라는 것은 특별하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지만, 그 처음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곁을 떠나고 희미해지게 되는 것이다.
떠나간 것들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떠나온 것들에 대해서는 이제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았다.
어릴 때는 감정이 무뎌지는 것은 슬픈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어릴 때 왜 그게 슬픈 것이라 생각했었는지에 대한 이유도 생각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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