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알레포를 떠나 터키 가지안텝에 도착한 것은 보슬비가 내리던 한밤중이었다.
늦은 시각에 들른 호텔의 카페테리아에는 가지안텝의 그 흔한 타르흔이 남지 않아서 항아리 케밥조차 못만든다고 했다.
시샤는 있어도 석탄도 남은 게 없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시킨 커피마저도 너무 태운 나머지 불쾌할 정도로 썼다.
카페테리아의 그 남자는 재료가 남아있지 않은 이유를 나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어설픈 영어로나마 가능한 모든 말을 열심히 쏟아냈다.
인근 식당에서는 베이란이라는 육개장과 아주 비슷한 국밥을 팔고 있었다.
다행히 한참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길을 오가는 청년들의 눈매는 비 때문인지 더 지쳐보였다.
알레포에서부터 여행 욕구를 반쯤 잃은 채 뮌헨으로 돌아갈 항공편을 알아보던 차에 도착한 가지안텝에서 맞닥뜨린 풍경은 여행에서 처음으로 완전한 의욕상실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호텔에 도착할 때 즈음 레몬향이 거리를 휘감았다.
요리에 레몬을 자주 쓰는 지역 특성상 음식쓰레기가 거리로 나올 시간이다보니 그랬던 것 같다.
호텔 옆 주택집 2층에는 한 청년이 걸터앉아 마치 실연을 이겨내는듯한 느낌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저 창틀을 오래 전에 만들었을 목공은 알고 있었을까.
청년의 나즈막한 울림이 나그네의 마음을 이리도 어루만져 줬을지를.
다소 위안이 된 채로 객실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테라스에서 보이는 풍경은 시리아와 터키의 국경을 색깔로 분명하게 나누고 있었다.
예세멕 호숫가에서 양을 치던 노인은 우수에 젖다 못해 지쳐있는 듯했다.
나를 잠시간 보더니 선뜻 말을 걸었다.
분명 그 노인은 나 또한 지쳐있다는 동질감을 느꼈던 게 분명했을 것이다.
“힘드시오?”
“네, 비가 와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곳으로 당신을 이끈 건 무엇이오?”
“지치기 싫어서 도망치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지치는군요.”
“그럴 땐 나는 사해로 가서 쉬다가 온다오.”
“네..”
“그나저나 이름이 어떻게 되오? 난 밍코 발칸스키라 하오.”
“저는 지인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그런데 영어를 아주 잘 하시는군요.”
“난 여기 사람은 아니오. 난 삼십 년 전에 이곳을 여행하다가 바로 이 동네에서 한 주민을 만났소. 그 주민은 그때부터 줄곧 나의 친구라오.”
“어디서 오셨습니까?”
“프랑스에서 왔소. 지금도 거기 살고 있지. 하지만 고향은 불가리아라오.”
“여행을 오신 거군요.”
“여행도 할겸 친구도 도우러 왔소. 지금처럼 양을 치러 말이오.”
“힘들진 않으십니까?”
“천천히 걷다 쉬다 또 걷고. 양을 치는 게 힘들 게 뭐가 있을 것 같소? 그저 늙어서 지친 것이지.”
“..그런데 사해는.. 볼 게 뭐가 있습니까?
“여행에 지친 자들을 위한 여행지라오. 꼭 한 번 가보시오.”
“그런데 어제 마침 중동에서 떠나왔습니다. 다음에 한 번 가보겠습니다.”
“나무는 겨울에도 자라는 걸 나이테가 보여준다오. 여행이 어떤 방식이 되든 당신의 영혼은 조금씩 자라고 있을 것이오. 지금 나도 마찬가지라오. 언제가 됐든 내가 거기서 느낀 감정을 당신도 꼭 느껴보길 바라오.”
대화를 마친 후 뒤돌아 떠나다가 돌아보니 그는 어느 나무 옆에 서서 하얀 볼펜과 수첩을 꺼냈다.
한참 더 가다가 바라보니 그는 아직 그 나무 옆에 서 있었다.
그가 작은 점이 될 때쯤 그는 그 나무 옆에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누군가 나의 뒷모습을 저리 오래 바라보아 주었던 적이 언제런가.
외로움은 같은 크기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웅큼의 관심만으로도 마음을 감싸 안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는 불가리아 출신의 세계적으로 저명한 물리학의 석학이었다.
어쨌든 사해를 처음 알게된 건 지리학 교과서에서였다.
지리학 교과서에 실린, 신문을 펼쳐든 남자가 호수 위에서 유유히 신문을 보는 사진 말이다.
사해를 가보자고 결심을 했던 건 그 다음 날 밤 호텔 객실에서였다.
티비에서는 마침 요르단의 와디럼 사막에 대해 소개하고 있었다.
요르단 암만행 다섯 시간짜리 트랜짓 항공편을 바로 다음 날 탈 수 있었다.
암만에 도착 후 바라본 사해 호수 풍경은 마치 지리학 교과서를 다시 펼쳐든 기분이었다.
잡지를 펼쳐들고 책 속의 모습을 따라하는 사람들, 팔다리를 하늘로 뻗친채 오리떼를 흉내내는 사람들 모습이 재미있었다.
전체 호수 풍경을 찍느라 연신 셔터를 눌러대다가 호수 반대편 절벽에 카메라 앵글이 머물 때쯤 한 사내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디서 오셨소?"
"가지안텝."
“아니, 거기가 고향이오?”
“아, 그게 아니라 방금 거기서 비행기로 왔습니다.”
"지금 찍는 호수 저편이 어딘줄 아시오?"
"이스라엘?"
“...”
한 동안의 침묵이 궁금하여 옆을 돌아볼 때까지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눈이 마주하는 순간, 그의 눈에서 알 수 없는 떨림과 공허함이 피어올랐다.
"저 곳은... 팔레스타인이오...”
아차 싶은 마음을 수습할 사이도 없이 그는 광장히 슬픈 표정을 마지막으로 뒤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그를 불러세워 뭐라고 말이라도 하고 싶은 생각에 손을 번쩍 들고 한두 걸음 가다가 아무 말도 못하고 일순간 움찔하며 멈춰섰다.
계절을 잊은 듯 두툼한 무채색 양복 상의는 가족과 놀러온 휴양객의 다채로운 색감 속에서 더욱 침울하면서도 흑백과 칼라의 대조가 무척 도드라져 보였다.
실밥이 터져 한쪽이 살며시 튀어나온 양복 속의 어깨는 한없이 낮아보였다.
사람은 뒷모습을 보일 때 진심이 보인다고 하던가.
겨우 그 한 마디 던지고 돌아서던 그의 모습은 그 어떤 슬픈 표정이나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아픔으로 쌓여있었다.
그저 낯선 동양인에게서 듣고 싶은 말은 ‘팔레스타인’이라는 단 한 마디였을텐데.
지금 다시 만난다 해도 그 말을 쉽게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희망 없는 진실은 때론 독이 되기에.
그저 술 한잔 같이 기울일 수는 있어도 말이다.
여행은 제자리로 돌아옴이라는 일상적인 문구를 뒤로 하고 여행길이 삶이 되어버린 사람들, 인도와 터키, 그리고 중동을 여행하며 길에 멈춰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람들을 만났다.
대부분이 잠깐의 만남 후 각자의 길을 갔기에 깊은 대화를 오래 나누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그들을 길에 머물게 한 신호등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곤 했다.
빨간불일까, 파란불일까.
그 신호는 그들에게 무슨 말을 전했을까.
여기 멈추어 서라고, 계속 나아가라고, 왼쪽 오른쪽 꺾어보라고.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것은, 그들과 가졌던 어떤 낭만이나 인상 깊은 대화가 아닌 그들의 발걸음이 지닌 삶의 작은 용기이다.
나는 요며칠 그때 스쳐간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이젠 얼마나 늙었을지 문득 다시 보고싶어진다.
그때 고마웠다고, 그때 미안했다고 말 건내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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