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 밤은 성탄 전야임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적막이 감돌았다.
예년보다 더욱 혹독한 한파 속에서 성탄 전야임을 증명하는 것은 불 꺼진 상점 유리창 너머의 전구와 얼어붙은 보도 한가운데 홀로 빛나는 크리스마스 트리뿐이었다.
활기라곤 없는 무채색의 밤, 이따금씩 갈 곳 잃은 이들이 한 비스트로의 낡은 나무 문을 열고 하나둘 들어섰다.
실내에는 천장과 벽체, 바닥재까지 장미나무로 마감되어 있었다.
붉은 기운 위로 세월의 때가 깊게 내려앉아 묵직함이 감돌았다.
켜켜이 쌓인 왁스, 그 위로 수십 년간 스쳐 간 발자국, 기화한 알코올이 내려앉으며 만들어낸 윤기가 어스름한 불빛 아래 핏빛 늪처럼 반짝였다.
바 끝자락에 앉아 핀초에 와인을 기울이고 있는 여인, C2는 가만히 잔을 들었다.
과거 C1이라는 이름으로 '구르밍'을 이끌며 반려견 관리의 필요성을 완전히 제거시키는 사업에서 대성을 이룬 그녀였다.
그 성취를 발판 삼아 한 단계 더 발전한 C2로 개명한 것이다.
그녀는 아무도 자신을 알지 못하는 이 멀고 먼 나라로 홀가분하게 휴가를 온 참이었다.
구석자리의 중년 남자는 메마른 표정으로 베르무트를 마시며 감자칩을 씹었다.
바에 앉은 노인은 무성의하게 견과류를 씹으며 자신의 메마른 손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코트를 어깨에 걸친 채 창가에 앉은 젊은 여자는 식어버린 커피잔의 손잡이를 멍하니 어루만졌다.
앞에 놓인 절인 청어와 아크바비트에 손도 대지 않은 채 휴대폰만 바라보던 젊은 남자는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자정을 한 시간 앞둔 시각,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공기가 습기와 서늘함을 머금기 시작했다.
코끝을 스치는 짙은 오존 냄새가 다가오는 폭풍우를 경고하고 있었다.
티비에서는 특별 편성된 기상예보가 나오고 있었다.
점원이 채널을 몇 차례 돌려보았지만 대부분의 채널들이 기상예보만을 송출하고 있었다.
“Den förutspådda extremkylan till följd av den försvagade atlantiska cirkulationen slår nu till med full kraft. I kombination med att polarvirveln rört sig söderut och ett blockerande högtryck försätter den oss i en oöverträffad köldvåg. Det handlar om bokstavlig "skärande kyla", en kyla så extrem att huden känns som att den skärs sönder, och inte bara norra utan även södra Europa har förvandlats till en gigantisk frys. I Sydkorea, som drabbats med full kraft av extremvädret, råder svår förödelse. Fordonstrafiken har helt stannat, värmesystem har frusit sönder och frysta vattenledningar har till sist tvingat kraftverk att stänga ner, vilket skördar ett historiskt rekordantal dödsoffer. Bara i huvudstaden Seoul har sjuttiofyratusen åttahundranittiotvå människor omkommit under de tio dagar som gått sedan den extrema kylan slog till, och nationellt väntas siffran överstiga tvåhundratusen. Just nu uppmäts minus femtiosex grader i Seoul…”
이제는 익숙한 일상인지 손님들도 점원들도 가끔 흘깃거릴 뿐 별다른 동요는 보이지 않았다.
점원들은 바에서 잔을 닦으며 마감을 준비했다.
손님들에게 이제 마칠 시간임을 예고하는 무언의 신호였다.
창밖의 거센 바람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과 소리 없는 속삭임 속에 약간의 걱정이 스며 있었다.
눈치를 챈 손님들이 남은 잔과 주전부리를 비우며 하나둘 일어섰다.
C2 역시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동전 소리와 코트 깃을 스치는 마찰음이 실내를 울렸다.
그러나 그들이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대비가 쏟아지며 강풍이 거리를 휩쓸었다.
요란하게 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흠뻑 젖은 손님들이 바람에 밀려들 듯 돌아왔다.
"폭풍우가 지날 때까지만이라도 머무를 수 있을까요? 어지간하면 집에 가겠는데 꽤 심하네요.”
한 점원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문이 흔들리지 않도록 걸쇠를 단단히 걸어잠갔다.
그리고 다른 점원이 유리창에 분무기로 물을 뿌린 후 신문지를 잔뜩 붙이기 시작했다.
유리창이 강풍에 깨지더라도 파편이 비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손님들도 합세해서 점원들을 도왔다.
짙은 붉은 빛이 감도는 장미나무 공간은 이제 창과 바닥을 때리는 장대비 소리만을 제외하면 세상과 온전히 분리되었다.
한 점원이 난로를 끌고 와 큰 테이블 한켠에 두고 찻잎을 넣은 유리 주전자를 올린 후 손님들을 테이블로 불러모았다.
다들 흠뻑 젖은 외투를 의자 등받이에 걸치고 모여앉았다.
찻잎이 우러나자 사람들은 하나둘 통성명을 하더니 제 안의 썩어가는 사연들을 나지막이 뱉어내기 시작했다.
중년 남자는 평생을 바친 직장에서 버려진 일을,
노인은 아내의 간병과 수발로 지쳐버린 자녀들과의 관계를,
젊은 여자는 며칠 전 애인과의 결별을,
젊은 남자는 아무리 애를 써도 끝이 나지 않는 빚과 그보다 더 무거운 삶의 무게를,
C2는 구르밍 3단계로 무엇을 서비스해야 할지에 관한 고심을,
한 점원은 분수설사 대회를 앞두고 자기 성적의 지지부진함을 고백했다.
"대체 왜 이렇게 살아가며 관리해야 할 일들이 많은 건지...하나가 아물고 나면 또 다른 데서 고름이 흘러나와요. 죽기 전까진 할 일이 끝나지 않겠죠…”
젊은 남자가 한숨을 쉬며 내뱉은 그 한마디가, C2의 귓가에 둔탁하게 꽂혔다.
C2는 잔을 내려놓았다.
예전에 구르밍의 고객이 했던 말이 환청처럼 겹쳐 들렸다.
‘털은 없어졌는데, 왜 할 일이 이렇게 많죠?’
그때 C2가 깨달았던 진실, 사람들이 진짜 원했던 것은 '관리할 필요가 없는 삶'이었다.
C2는 와인 잔 너머로 젊은 남자를 가만히 건너다보았다.
피로에 찌들어 무너져가는 얼굴.
헝클어진 머리카락.
푸석한 피부.
충혈된 눈.
구겨진 옷.
식어가는 차.
그 모든 것이 이상하리만치 익숙했다.
사람들은 개를 두고는 계산기를 두드렸다.
먹이고, 씻기고, 빗기고, 병원에 데려가고, 배설물을 치우고, 털을 관리하고, 늙으면 병을 관리해야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면 그들은 질문을 던졌다.
‘굳이 이렇게까지 관리하며 키워야 하나?’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비참하고 반복되는 일이 끊임없이 뒤따르는 삶에 대해서는 ‘굳이?’라는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 일어나고, 밥을 먹고, 일하고, 돈을 벌고, 병들고, 늙어가고, 상처받고, 타인과의 관계를 미련하게 유지하려 애쓰는 이 무겁고 지독한 반복.
하나가 끝나면 또 다른 하나가 시작됐다.
상처가 아물면 또 다른 상처가 생겼고, 빚을 갚으면 또 다른 빚이 생고, 관계를 정리하면 또 다른 관계가 찾아왔으며, 할 일을 마치면 또 다른 할 일이 생겼다.
일생 동안 관리라는 행위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C2의 머릿속에서 구르밍의 철학이 다시금 정교하게 톱니바퀴를 돌리기 시작했다.
철컥.
1단계 - 털 제거.
철컥.
2단계 - 개 제거.
그리고…
그녀는 눈을 감았다.
마지막 톱니가 맞물렸다.
철컥, 3단계.
C1의 입꼬리가 장미나무 그늘 속에서 아주 천천히, 그리고 차갑게 올라갔다.
증오나 분노 혹은 광기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반복되는 무의미한 관리와 고통을 끝내주겠다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명쾌하며 첨예한 사업가의 눈빛이었다.
단단히 잠긴 두꺼운 목재 문. 밖에서 휘몰아치는 사나운 폭풍우.
아무도 들어올 수 없고, 아무도 나갈 수 없는 완벽히 고립된 공간.
C2는 잔에 남은 와인을 모조리 삼키고는 주전자의 차를 잔에 따르면서 오직 자신에게만 들릴 만큼 나지막한 목소리로 독백을 읊조렸다.
"개는... 그저 시작이었을 뿐이었구나."
바닥 위에 떨어진 빗방울을 무심히 바라보던 그녀는 고개를 들어 사람들에게 말했다.
중년 남자를 바라보았다.
“후회를 관리하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가족을 관리하고”
젊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관계를 관리하고”
젊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생계를 관리하고”
점원을 바라보았다.
“치질을 관리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털을 없애도 삶이 가벼워지지 않았던 건 관리해야 할 진짜 근원이 너희 자신이었기 때문이야. 매일같이 그 수많은 불행을 관리하고, 그 비참한 삶을 관리하느라 얼마나 피곤했겠어."
C2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어 펜의 단단한 감촉을 매만졌다.
"걱정 마.”
그녀는 잔을 내려놓았다.
“구르밍이 늘 그랬잖아…”
비가 창문을 때렸다.
“이번에도 관리할 필요 자체를 없애줄 테니까. 영구적으로."
성탄의 밤을 부수는 폭풍우는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C2는 3단계의 첫 고객이 될 사람들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그렇게, 짙고 붉은 윤기가 흐르는 장미나무 방주 안에서 인류의 그 지독하고 비참했던 장밋빛 인생은 조용히 막을 내릴 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수첩을 펼쳤다.
펜 끝을 종이에 대고 첫 번째 줄을 써내려갔다.
사각.
구르밍 3.0
그리고 입꼬리를 살짝 올린 그녀는 두 번째 줄을 채웠다.
사각사각.
3단계 - 인류 제거
순간 창밖에서 거대한 천둥이 울렸다.
'넣기소년의 신변잡기 > 탕비실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C1 (0) | 2026.09.18 |
|---|---|
| 524 (0) | 2026.09.18 |
| 첫 만남 이야기 (2) | 2021.11.12 |
| 많이 추운 날에는 훗카이도가 생각납니다 (0) | 2020.01.13 |
| 처음 (0) | 2019.10.13 |
| 오래 전의 낯선 이들이 그리울 때 (0) | 2019.03.17 |
| 제가 기차를 탔습니다 (0) | 2019.03.11 |
| 벗어날 수 없는 (The Endless, 2017) 한글 자막 (4) | 2018.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