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의실의 공기는 늘 눅눅하게 가라앉아 있다.
밀폐된 공간 특유의 정체된 공기, 섬유 사이로 스며나오는 다양한 체취, 식어버린 종이컵 속 믹스커피 냄새, 그리고 사람들의 피로가 뿜어내는 미열이 뒤섞인 탓이다.
하루 내내 조명이 꺼지지 않는 그곳의 시공간은 언제나 오 이사가 지배한다.
그의 별명은 524.
그 별명답게 그는 주 5일 24시간 회의를 소집한다.
그는 단순히 회의가 생산성을 고취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여기는 수준을 넘어, 회의라는 행위 자체에 종교적인 고결한 경외심을 품고 있는 사내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그에게 무의미했다.
그에게 있어 회의는 결론을 도출하는 수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피난처이자 유일한 실존 증명이었다.
불 꺼진 아파트의 냉기나 텅 빈 거실에서 들려오는 냉장고 모터 소리보다는 회의용 탁자를 가운데 두고 사람들이 숨죽여 자신의 입술을 바라보는 이 좁은 방이 그에게는 유일하게 온기가 도는 세상이었다.
결론이 나지 않는 대화, 치질에 치질을 무는 의견 교환, 칠판 위로 부딪히는 마커펜 소리만이 그가 온전히 숨을 쉬는 유일한 공간 같았다.
부하 직원들에게 그는 분노를 자아내는 상사라기보다 서서히 숨통을 조여오는 만성 호흡기 질환에 가까웠다.
그날 오 이사는 1회의실에 40여 명의 직원들을 소집했다.
중대한 프로젝트 위기라도 터진 줄 알았던 직원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서려있었다.
오 이사가 빔 프로젝터를 켜자 새하얀 스크린 한가운데 돋움체로 쓰인 단 한 줄의 안건이 띄워졌다.
'오늘 점심 메뉴 선정의 건'
직원들의 무기력한 의견 교환이 한동안 이어진 후, 오 이사는 안경을 벗어 셔츠 자락으로 닦으며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그의 표정은 경건했다.
국가의 존망을 건 중대 협정에 임하는 외교관의 얼굴이거나, 난치병의 수술 방식을 고심하는 집도의의 그것에 가까웠다.
"음, 그러니까… 순대국밥의 단점은 아까 이 대리가 지적했듯이 국물의 염도가 오후 업무 집중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거야. 타당해. 그런데 정 주임, 자네가 말한 샐러드는 지속가능성 면에서 에너지를 담보하지 못해. 두어 시간쯤 지나면 다시 허기가 질 텐데 그럼 필연적으로 업무 흐름이 끊기지 않겠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정 주임의 눈꺼풀은 이미 반쯤 내려앉아 있었고, 맞은편 박 과장은 볼펜을 손가락 사이로 돌리며 벽시계의 초침만 멍하니 응시했다.
시계 바늘은 1시와 2시를 지나 이제 3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차장이 마른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그냥 가까운 구내식당으로 가시죠"라고 말하자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반박했다.
"이 차장의 그 안일한 태도가 팀의 창의성을 죽이는 거야. 식사는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오후의 전략을 세우는 첫 단추거든."
회의는 5시까지 이어졌다.
제육볶음의 매운맛이 스트레스 해소에 주는 긍정적 영향력과 샌드위치가 주는 시간 절약의 경제적 효용성 등 수많은 글자들이 화이트보드를 빽빽하게 채웠다.
직원들의 눈동자에서는 점차 생기가 사라졌고 위장에서 들려오던 꼬르륵 소리마저 지쳐 잦아들었다.
회의가 시작될 때 창밖으로 내리쬐던 햇빛은 이미 서쪽 건물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오후 6시, 기나긴 난상토론 끝에 마침내 오 부장이 결론을 내렸다.
"모두의 의견과 오후 업무 동선을 종합한 결과,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구내식당이다."
열두 명의 생기를 빨아들인 오 이사의 목소리는 청아했다.
짧게 헛기침을 한 이 차장 외에는 모두 불편한 기색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아니, 불편한 기색을 내비칠 일말의 체력도 의지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허기와 피로에 짓눌려 자아가 거세된 직원들이 텅 빈 표정으로 유령처럼 줄을 서서 늦은 배식을 받으러 걸어갔을 뿐이다.
그러나 구내식당은 이미 문을 닫은 지 몇 시간이 지난 뒤였다.
"원점으로 돌아가 회의를 다시 열어야겠군."
어떠한 당혹감도 없는 오 이사의 서늘한 목소리가 복도를 나직하게 감돌았다.
끝을 알 수 없는 무한한 궤도가 1회의실에서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화이트보드의 ‘점심’이라는 단어 뒤로 ‘겸 저녁’이라는 세 글자가 덧붙여졌다.
"구내식당의 폐점은 예상치 못한 변수였지만 위기는 곧 기회다. 바로 야간 업무를 위한 최적의 영양소를 다시 설계할 기회. 오늘 우리는 메뉴 선정에 있어 불가피하게 많은 시간을 소모했어. 이는 그만큼 우리가 신중하고 치밀한 조직이라는 증거지만 물리적인 업무 시간이 부족해진 것도 사실이지.“
이 말을 마친 오 이사는 ‘오늘 점심 겸 저녁 메뉴 선정의 건’ 안건 아래로 안건 하나를 더 추가했다.
‘금일 야근의 필요성 및 개별 잔여 업무량 평가의 건‘
'넣기소년의 신변잡기 > 탕비실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C1 (0) | 2026.09.18 |
|---|---|
| 첫 만남 이야기 (2) | 2021.11.12 |
| 많이 추운 날에는 훗카이도가 생각납니다 (0) | 2020.01.13 |
| 처음 (0) | 2019.10.13 |
| 오래 전의 낯선 이들이 그리울 때 (0) | 2019.03.17 |
| 제가 기차를 탔습니다 (0) | 2019.03.11 |
| 벗어날 수 없는 (The Endless, 2017) 한글 자막 (4) | 2018.07.20 |
| 권총튀김 (0) | 2018.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