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issance라는 철학 용어가 있다.
롤랑 바르트와 자크 라캉 둘 다 사용했었는데 누가 먼저 사용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자크 라캉의 jouissance는 중화권(sinosphere)에서는 그 의미가 그동안 향락이나 희열로 번역되어 왔다.
그러나 한국의 홍준기가 그의 저서 라캉의 재탄생에서 향유라는 번역을 내세우면서 점차 이 의미로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역시 이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듯 하다.
쾌락으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으나 라캉의 철학을 잘 알고 있는 자들에게서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족으로 바르트의 jouissance는 다소 의미가 다른데, 영어권에서 라캉의 것은 enjoyment로, 바르트의 것은 주로 bliss로 해석된다.
위에서 언급한 홍준기는 jouissance의 의미에 접근하면서 세 가지 전제를 내세웠다.
첫째는 고통 속의 쾌락, 둘째는 죽음의 충동과 결합된 쾌락, 셋째는 법적 개념인 용익권과의 연관성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전제로 홍준기가 제안하고 동시에 고집하는 번역이 향유다.
다른 학자들이 이에 대해 어떻게 해석하고 논하든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홍준기는 셋째 전제에 중점을 둔 나머지 정작 중요도를 동일하게 두어야 할 첫째와 둘째는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어와 일본어에서 향유는 사전적으로 누려서 가진다는 의미이기에 본디 성적인 뉘앙스가 거의 배제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예를 들어 자유와 풍요를 향유한다는 표현과 같이 통상 어떠한 긍정적 가치를 풍족하게 소유하여 즐긴다는 개념이다.
중국어에서는 그 의미를 집단을 넘어 사회에서 권리, 권한, 특권, 명성을 누리는 지위를 즐긴다는 의미로 보다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있다.
각설하고 각각의 정의된 의미를 면밀히 살펴보면 향유는 소유와의 연관성으로 인해 계급적인 뉘앙스를 갖게 된다.
따라서 고통이나 죽음과의 의미론적 연관성은 극히 희박한 것이다.
이 관점에서 바라볼 때 향유가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지를 생각해 보자.
나는 대리석 욕조에서 거품 목욕을 하거나 명품 쇼핑에 나선 여피족이 떠오른다.
그런 여피족이 진정 고통 속의 쾌락에 있는 것일까?
그들이 거품 목욕을 할 때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고 점원에게 가격이 얼마인지를 물어볼 때 괴로움에 빠져있을까?
법적을 전공했던 홍준기가 법적 개념을 운운하며 향유라는 표현을 제시할 때 자신을 안다고 가정된 주체로서 위치시키며 자신의 기득권을 얼마나 향유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나는 그 향유에는 어떠한 고통도 부재한다는 점에서 나는 그러한 표현이 전혀 내키지 않는다.
그리고 번역과 관련하여 많은 자들에게 부족한 것은 법학이나 정신분석학 공부가 아닌 국어 공부다.
나는 jouissance의 의미로 향락을 선호한다.
물론 완벽한 번역이 불가능한 단어, 구문, 문장, 표현은 차고 넘칠 정도로 많다.
그래서 그런 경우에는 단순한 번역이 아닌 초월 번역이나 현지화가 필요하다.
아무튼 향락은 내가 앞서 내세운 두 가지 최소 조건을 충족시킨다.
즉 소유를 연상시키는 향유와는 달리 쾌락과 운을 맞추는 향락은 쾌락과 구별되며 짝지어지는 유용성을 지닌다.
사실 나는 희열에도 반대하지는 않는다만 향락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될 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향락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고통 속의 쾌락 또는 죽음의 충동과 결합된 쾌락이라는 의미를 수많은 후보들 가운데 가장 잘 전달한다는 것이다.
향유 산업이나 희열 산업이라는 표현은 없다.
향락 산업이라는 말에도 암시되듯 향락은 어떤 지나친 또는 과도한 쾌락을 추구한다는 부정적 뉘앙스를 담고 있다.
향유에는 그 어떤 중화권의 사전적 의미에서도 그러한 부정적 뉘앙스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홍준기의 오역을 향유하는 기여와 향유를 고집하는 국내 독자 및 학자들의 국어 수준에 두둔의 박수를 보낸다.